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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지역대학원(중남미학과)/라틴아메리카 역사

Mangan Trading Roles ch.3 Light on the Chicha Heavy on the bread 번역

치차는 가볍게, 빵은 무겁게
식민 시대 양조와 제빵 시장

1604년, 포토시 전체에 새로운 냄새가 천천히 퍼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차(chicha, 옥수수 술) 가마솥에서 뿜어져 나온 냄새는 선술집과 밀가루 창고로 이어졌고, 마침내 시청까지 흘러가 시 당국의 권위에 불쾌한 메시지를 전했다. 치차 양조업자들이 전통적인 옥수수 기반 술을 밀가루를 써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565년부터 포토시 시는 원주민의 치차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 옥수수가루의 수입을 통제하려고 시도했으며, 어느 해는 성공적이기도 했지만, 어느 해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1604년에는 스페인 왕실과 시의회가 공급을 통제하려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창의적인 치차 양조업자들은 단순히 레시피를 바꿈으로써 옥수수 수급 제한에 대응했다. 이처럼 원주민 전통에 대한 창의적 적응은 스페인 식민 당국이 원주민 음주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무력화시켰고, 대신 유럽식 핵심 식품인 밀빵 소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옥수수 가루를 빼앗기게 되자, 스페인 시의회는 빵의 주재료를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 옥수수 규제를 철회했다.


치차와 빵은 동시에 포토시 시장에서 부상했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1604년, 체중이 부족한 빵과도한 소비는 시의회가 개입하고자 한 주요 식량 문제였다. 빵은 공공을 위한 서비스로 간주되어 장려되었고, 시는 제빵소에 노동 보조금을 제공하고, 기준 중량에 미치지 못한 제빵업자를 처벌했다. 반면, 치차 논의에 있어서는 이는 식민지 질서에 대한 위협이자 노동력 손실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양측 모두를 통제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원주민 양조업자들이 옥수수가루를 구하기 어려울 때는 밀로 전환했고, 그 결과 빵 생산에 필요한 밀 공급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pulpería의 위치를 통제하려 했던 왕실과 시의회의 노력처럼 반복된 실패로 이어졌다.


[쉬운 설명]

  • 주제는?
    이 장은 포토시 식민지 시대의 두 주요 음식—치차(술)와 빵—을 통제하려 했던 식민 정부의 실패를 다루고 있어요.
  • 왜 치차를 통제하려 했나?
    원주민들이 치차를 많이 마시는 것을 억제하려고 옥수수 가루 공급을 제한했어요.
  •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
    치차 양조자들은 그냥 밀가루로 레시피를 바꿨어요! 그 결과 빵에 써야 할 밀가루가 부족해졌고, 결국 스페인 당국은 옥수수 제한을 풀었어요.
  • 빵은 왜 중요했나?
    빵은 스페인식 핵심 식량이었고, 정부는 생산을 장려했어요. 반면 치차는 통제 대상이었죠.
  • 핵심 포인트는?
    치차와 빵을 통제하려는 정책은 문화 차이와 민간의 대응 전략 앞에서 무용지물이었고, 현지의 창의성과 적응력이 정책을 압도했다는 거예요.

pulpería들처럼, 스페인 관료들은 지주, 상인, 노점상, 소비자들과 시장 제품 규제를 두고 경쟁했다. 이런 세력들은 빵과 치차 같은 중요한 음식의 의미에 대해서도 협상해야 했다. 빵은 원래 스페인 음식이었고, 치차는 원주민 음식이었다. 언어, 의복, 종교가 집단 간 경계를 나누는 표시였던 것처럼, 음식과 음료도 그런 문화적 경계를 형성했다. 16세기에는 포토시 시의회와 같은 엘리트 관료들이 이런 구분을 지키려 애썼다. 음식의 구분은 시의회 기록과 현대 역사서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며, 빵과 치차가 식민지의 주류 음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570년대에는 원주민 양조자들이 치차를 만들었고, 17세기 초에는 스페인인과 아프리카인이 함께 참여했다. 같은 시기, 스페인 제빵사들은 아프리카 노예와 원주민 노동자를 동원해 빵을 만들었다.

이 두 제품의 생산과 판매 과정을 비교하면, 식민지 도시 경제의 성별, 민족적 복합성이 드러난다. 포토시에서는 무라타(mulata) 여성들이 치차를 팔았고, 원주민 남성이 빵을 굽고, 원주민 여성이 빵과 치차를 함께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스페인 여성들은 치차와 빵 모두에서 소규모 사업을 운영했다. 수만 명의 포토시 주민들이 이 제품들을 구입했다. 1603년에는 빵과 치차가 도시의 주요 소비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제빵소 28곳이 연간 약 1,210,900페소어치의 빵을 팔았고, 치차 산업은 연간 1,024,000페소 규모였다.
치차는 연간 60만 병이 팔렸으며, 병당 최대 10페소였다. 이는 감자 산업(120,000페소)이나 와인 산업(500,000페소)보다 훨씬 큰 시장이었다. 하지만 치차와 빵은 생산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치차는 소규모 가내 수공업 형태로 유지되었지만, 빵은 노동력을 강제 동원한 대규모 제빵소와 길드를 통해 생산되었다. 이 두 제품은 모두 도시 안에서 현지에서 생산된 식량이었기에, 코코아, 과일, 와인처럼 외부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도시 내부 구조를 연구하는 데 적합한 사례였다.


강조된 부분 해석:

“이 장은 1560년대부터 1660년대까지 포토시에서 식민 산업으로서 치차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추적하며, 그 음료의 규제, 생산, 소비를 함께 고찰한다.”


[쉬운 설명]

  • 치차와 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치차는 원주민의 문화, 빵은 스페인의 문화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어요. 이를 통제하는 것은 곧 사회를 통제하는 것과 같았어요.
  • 누가 만들고 팔았나?
    치차는 주로 원주민 여성, 무라타 여성이 만들고 팔았고, 빵은 스페인인이 지배했지만 실제 생산은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노동자들이 했어요.
  • 어떤 경제적 차이가 있었나?
    • 치차: 소규모, 여성 중심, 수공업 기반
    • 빵: 대규모, 길드 중심, 강제노동 기반
      하지만 경제 규모는 비슷할 정도로 치차도 엄청난 시장을 형성했어요.
  • 왜 중요할까?
    치차와 빵을 둘러싼 규제와 생산 양상은 포토시의 경제 구조, 성별·인종 질서, 그리고 식민지 권력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핵심 사례예요.

 

“이 많은 밀가루를, 포토시의 원주민들은 술로 써버린다”

옥수수 가루 규제하기 (Regulating Corn Flour)

16세기에 제분업자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옥수수가루를 생산하기 시작했을 때, 그 효과는 식민 시장에서 알코올에 대한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1565년, 포토시의 행정관(Gaspar de Saldaña)은 옥수수 가루의 “발명”을 비판했는데, 그것이 도시 원주민들의 치차(chicha) 소비를 급격히 증가시켰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을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옥수수 가루 금지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옥수수가루가 없으면, 그들은 필요한 양만 갈아 술을 만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음주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이들은 치차가 도덕적, 육체적, 사회적 해악을 준다고 비판했다. Saldaña의 주요 우려는 음주가 ‘큰 방종’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주민 노동자들이 원래 일해야 할 시간 동안 치차를 마시며 놀고 있는 탓에, 보랏체리아스(borrachearías, 선술집)에서 허비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술에 취해 광산 일에 적합하지 않게 되며, 이는 스페인 식민지 경제의 핵심과 충돌하는 일이었다. 왕실 관료들과 사제들도 심각한 영적, 성적 타락을 경고했다. 치차 음주자들은 “며칠 밤낮을 춤추고 술 마시는 데 능한 자들”이라며 비판받았다. Saldaña는 옥수수가루를 금지함으로써, 포토시의 미타요들(강제노동자)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


시의회는 옥수수 공급을 통제해 치차 소비를 제한하려는 목적을 가졌고,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의회는 도시 전체의 식량 공급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로는 옥수수 판매를 금지했고, 다른 때는 밀가루 판매를 소규모로만 허용하도록 규정하며 식량 공급을 조정했다. 하지만 옥수수가루 금지 시도는 실패했고, 시의회는 ‘술의 강도’를 줄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옥수수가루 판매에 관한 법령들은 엘리트 계층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반영한 유연한 정책 집행을 보여준다. 17세기 중반까지 시의회 의원들은 치차 생산 개입보다는 **치체리아(chichería, 치차 선술집)**를 향한 설교로 돌아서곤 했다. 치차 유통의 핵심은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쉬운 설명]

  • 무슨 일이 있었나?
    옥수수가루로 치차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자, 스페인 당국은 이를 통제하려 했어요. 치차는 원주민들이 술로 많이 마시는 문화였고, 스페인 입장에선 음주, 노동력 손실, 도덕적 타락 문제로 간주됐어요.
  • 그래서 뭘 했나?
    옥수수가루를 아예 금지하거나, 판매를 엄격히 제한하려 했어요. 하지만 이런 조치들은 잘 통하지 않았고, 결국은 “술 세기 줄이기” 같은 미봉책으로 흘러갔어요.
  • 왜 중요한가?
    이 사례는 스페인 식민 당국이 통제하고 싶었던 원주민의 삶—특히 경제, 식생활, 술 문화—이 얼마나 탄력적으로 저항하고 조정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장면이에요.

 

바르가스(Vargas) 같은 제빵업자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었다. 안데스 고지대에서 밀 재배가 보편화된 이후에도, 빵은 여전히 스페인 문명의 식문화로서 특별한 지위를 유지했다. 이는 특히 시의회 의원들의 인식에서 분명했다. 그들은 빵의 생산과 유통을 노동 보조금, 대규모 제빵소, 고정된 가격, 품질 검사 등을 통해 장려했고, “잘 구워지고 적절히 간이 된 빵”이 가장 저렴한 가격에 일반 대중에게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국왕의 신민, 즉 식민지 백성들에게 스페인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었으며, 식민지 안에서 스페인의 상징적 재생산 행위이기도 했다. 빵은 맛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지닌 상징이었다.


결론 (CONCLUSION)

잉카 시대에는 치차(chicha)의 생산이 국가 봉사의 일환으로 아클라(Aclla)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식민 시대에 이르러서는 빵을 만드는 제빵업자들이 국가를 섬기는 존재로 변모했다. 치차와 빵, 이 두 제품을 통제하려는 규제는 각각 하나는 죄악, 다른 하나는 미덕으로 여겨졌고, 식민지 포토시의 음식과 음료를 통해 문화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포토시 시의회의 치차와 빵에 대한 결정은,

  • 전자는 정당화(빵),
  • 후자는 악마화(치차)했을 뿐 아니라,
  • 도시 공간 개념 자체를 드러냈다.

2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상인들이 장사할 수 있는 위치를 규정한 조례 자체가 시의회 구성원들의 인종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의회는 **원주민 거주지의 스페인 상점(pulpería)**을 없애려 했고, 치체리아(chichería)가 모여 있던 원주민 구역을 도시 중심에서 제거하려 했다. 16세기 시의회 의원들의 생각에 따르면,

  • 포토시는 두 개의 원형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 가장 안쪽 원은 스페인 지역으로, 이곳에서는 빵이 팔리지만 치차는 팔리지 않았고,
    • 바깥 원은 원주민 지역으로, 여기서는 치차는 있었지만 빵은 없었다.

17세기가 되자, 문화적·노동적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이분법적으로 구성된 식민 양조 및 제빵 산업은 무너지게 되었다.


[쉬운 설명]

  • 치차와 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어요.
    치차는 원주민 문화의 일부로, 술이자 공동체적 상징이었고, 빵은 스페인의 권위와 문명의 상징이었어요.
  • 스페인 식민 권력은 빵을 미덕으로, 치차를 죄악으로 간주했어요.
    빵을 만드는 사람은 국가에 기여하는 사람이었고, 치차는 위험한 음주로 보았죠.
  • 도시 공간도 이렇게 나뉘었어요.
    스페인 상점은 중심, 원주민 치체리아는 외곽. 물리적인 공간이 인종적·문화적 경계로 작동했어요.
  • 결국 어떻게 되었나?
    17세기 중반쯤 되면, 이런 인위적인 구획이나 상징도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경제와 문화, 노동의 현실이 훨씬 복잡했고, 식민 권력도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어요.

 

이러한 상징적 원(스페인 중심, 원주민 주변)의 단순성은 실제 도시의 사회·경제 활동의 복잡한 중첩 구조로 대체되었다. 무역 기록은, 가격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1570년대까지는 치차에 비(非)원주민 노동자 소비층이 형성되었고, 1600년대 초까지 도시의 아프리카계 및 원주민들도 빵을 소비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초문화적 소비의 확산은 사회적 전환을 드러내며, 동시에 이 장에서는 수익 동기와 강제 노동이라는 도시 경제의 본질적인 이야기 또한 발견된다. 이윤을 추구하는 동기는 사람들의 취향과 소비 습관을 변화시켰고, 곡물과 밀가루 생산자들은 포토시 시장에 치차와 빵을 공급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1500년대 후반까지는, 은 세 수익을 벌기 위해 안데스 원주민들이 빵을 팔게 되었고, 이는 1550년대 이전까지는 안데스에서 존재하지 않던 문화였다. 1600년대에는 빵 굽기가 왕실에 대한 조공의 한 형태가 되었다. 치차의 경우, 1600년대 후반에 식민 산업으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이는 원주민 여성과 스페인 여성 모두의 경제 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자는 치차를 생산했고, 후자는 치차 전문 주점에서 일하며 소득을 벌었다. 그 주점은 이베리아 와인이 아닌 치차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치차와 빵을 소비하고 판매한 사람이 바뀌었지만, 일정한 요소들은 변하지 않았다. 제빵사는 사회적 명성이 더 높았고, 보통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빵은 은화 수천 페소 규모의 시장이었고, 그에 비해 치차는 훨씬 낮았다. 이 차이는 스페인 엘리트들의 빵 선호, 옥수수 수입에 대한 규제 노력, 그리고 시의회가 밀가루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 지원과 식량 배급을 꾸준히 제공한 점 등에서 비롯된다. 치차는 빵보다 위계 구조가 덜 정형화된 생산 시스템을 가졌고, 치차 생산 전용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제빵소와는 달리 소규모 주점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로 인해 제빵업자들이 치차 장사꾼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성별과 인종은 이 두 산업의 경제적 기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식료와 술과 관련된 노동은 여성들에게 에너지와 생계 수단을 제공했다. 빵 산업에서는 인종이 성별보다 더 중요했다. 스페인 여성과 남성은 함께 경제적으로 안정된 제빵업자 계층을 형성했고,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남녀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했다. 치차 산업에서는 오히려 성별이 더 중요했으며, 남성이 주요 생산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치차 산업은 여성 중심이었다.


[쉬운 설명]

  • 치차와 빵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되었고, 사회 계층을 넘나들며 팔렸어요.
    초기에는 치차는 원주민의 술, 빵은 스페인의 음식이었지만, 1600년대엔 혼합 소비가 일어났어요.
  • 이윤 추구는 사람들의 식습관도 바꾸었어요.
    시장이 생기면서 원주민도 빵을 팔고, 여성이 치차를 만들어 장사하게 되었어요.
  • 그러나 빵은 명예롭고 안정적인 일이었고, 치차는 그렇지 않았어요.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스페인인이 많았고, 길드와 세금 시스템 덕분에 더 많은 돈을 벌었죠.
  • 치차는 여성 중심 산업이었어요.
    여성들이 술을 만들고, 팔고, 주점에서 일했지만,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어요.

원주민 여성들은 치차를 통해 소규모 자영업에서 수익을 얻기 위해 판매자 및 주점 운영자로 활약했다. 인종적 정체성은 치차 산업의 하층부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원주민 여성들이 값싼 인건비와 힘든 노동 중심의 양조 작업을 담당했다.

빵과 치차 산업 모두에서 소수지만 다양한 소유주 집단이 존재했으나, 그들의 수익은 원주민 양조업자들과 인도인·아프리카계 제빵 노동자들의 착취를 기반으로 했다.


빵을 통해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가능성은, 이 시기 지속적인 스페인 시의회의 지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도시 시장에서의 빵의 문화적 우위를 반영했다. 빵과 치차 사이의 경제적·문화적 격차는 **도냐 이사벨 데 라 반데라(doña Isabel de la Bandera)**의 사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609년, 도냐 이사벨과 그녀의 남편 루카스 데 아기레(Lucas de Aguirre)는 2,000페소가 넘는 채무 문제로 법정 공방에 휘말렸다. 아기레가 포토시 외곽에서 댐 유지 관리 노동을 했던 반면, 실제로 가족을 도시 상업 활동을 통해 부양했던 건 이사벨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부지런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아기레는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는 증언도 있었다. 이사벨은 제빵사로서 실패한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봉제와 치체리아 운영과 같은 소규모 자영업을 이어갔다.


이사벨 데 라 반데라의 사례는 이 장의 세 가지 핵심 주제를 연결해준다:

  1. 포토시의 독특한 도시 성장
    • 음식과 음료에 대한 높은 수요가 규제를 낳았고,
    • 이는 새로운 노동 질서와 경제적 합의를 탄생시켰다.
    • 이런 구조는 16세기와 17세기 사이의 중요한 변화들을 보여준다.
  2. 포토시 인구의 성장과 다양성은 소비 방식의 변화를 이끌었다.
    • 빵은 16세기 중반까지는 원주민들 사이에선 인기 없었지만,
    • 곧 스페인 엘리트와 왕실의 우선 순위가 되었다.
  3. 지리적 고립성 때문에 빵 생산은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띠었다.
    • 17세기에는 왕실 관료들이 빵 생산을 위해 리페스 지역 원주민을 동원했고,
    • 이는 은광 노동처럼 원주민을 노동자이자 소비자로 만드는 과정의 일부였다.

치차 소비와 관련해서는, 포토시 인구 대부분이 원주민 출신이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미타 노동력(mita labor force)**의 일부였기 때문에, 치차 소비는 1560년대부터 급증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관련 경제 구조도 변화하게 되었다.


[쉬운 설명]

  • 원주민 여성들은 치차 산업의 핵심 노동자였어요.
    양조와 판매를 맡으며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고, 대체로 저임금의 고된 일을 도맡았어요.
  • 반면, 빵 산업은 더 많은 수익과 사회적 지위를 가져다주었어요.
    스페인 시의회는 제빵업을 장려했고, 엘리트들은 이를 ‘문명화된 식품’으로 보았죠.
  • 이사벨 데 라 반데라의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예요.
    남편이 힘든 노동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치차를 팔고 다른 소규모 장사를 하며 집안을 먹여 살렸어요.
  • 핵심 메시지는:
    포토시의 도시화와 경제 구조는 음식과 음료를 통해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분화되었고,
    식민지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권력과 생계를 조직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창이었어요.

 

치차(chicha) 생산 방식—특히 분쇄 옥수수를 사용하는 방식—은 도시 생활 양식에 맞게 조정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이르러, 포토시는 약 6만 명의 크리오요, 메스티소를 포함한 스페인 인구를 갖게 되었다. 이 인구는 광산이나 대규모 상업 활동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었고, 포토시는 가난한 스페인 노동자 수천 명의 거주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치차 시장은 이사벨 데 라 반데라 같은 스페인 여성들에게도 유리한 선택지로 떠올랐다. 스페인인의 치차 무역 참여식민지 시대 특유의 현상으로, 예컨대 공화국 시기에는 스페인 참여가 거의 없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둘째, 포토시의 치차 및 빵의 역사는,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를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 두 산업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16세기 후반의 치차 규제는 스페인 관료들이 원주민 음주를 억제하려 했던 시도였다. 하지만 17세기에 들어서면 새로운 세대의 시의원들은, 치차보다는 도시 중심부의 ‘혼합 인종 술집’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빵의 경우에는, 가장 체계적인 사회 통제 수단이 아프리카계 노예들을 처벌로서 제빵소에 가둔 사례였다. 17세기에는 빵 수요가 충분히 성장했고, 제빵소는 왕실이 후원하는 사회 통제의 도구가 되었다. 그 결과, 빵은 모든 포토시 사람들의 식단 일부가 되었고, 이는 새로운 식민 문화의 표현이었다.


이 새로운 문화에서는 아프리카계와 원주민 안데스인들이 감금되거나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그들이 치차를 마시며 함께 어울리는 장면도 자주 발견된다. 이는 시의회의 기대와는 반대였다—그들은 술집에서 이런 모임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예컨대 **비야 데 피게로아(Villa de Figueroa)**나 프란시스코 데 감보아(Francisco de Gamboa) 같은 관료들이 술집을 폐쇄하려는 노력은, 혼합 인종(원주민+흑인) 집단의 모임을 꺼리는 불안을 반영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임을 억제하려는 조례는 스페인 정책 자체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예를 들어, 리페스(Lipes) 원주민들을 제빵소로 끌어들여 도시로 이동시키는 정책은, 결국 그들을 아프리카계와 긴밀하게 접촉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종 간 사회화 제한 조례는 노동 동원 정책과 식민 경제 속 이윤 추구 논리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셋째, 치차와 빵 산업의 발전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신용 거래(credit negotiation)에 의존했음을 시사한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제빵사, 양조자, 소비자 모두 남녀를 불문하고 포토시에서 신용을 구했다. 빵집이나 치차집 주인들은 대량 밀가루 구매를 위해 외상거래를 했고, 소비자들도 구매를 위해 외상 신용을 필요로 했다.


[쉬운 설명]

  • 17세기 초 포토시의 인구는 많았고, 가난한 스페인 노동자도 많았어요.
    이들은 치차 소비층으로 새롭게 편입되면서, 치차 시장은 원주민 전용이 아닌 스페인 여성에게도 기회가 되었어요.
  • 스페인은 치차를 억제하려 했지만, 현실은 치차가 도시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고,
    술집에서 다인종 간의 어울림이 자주 일어났어요.
  • 빵은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장려한 식품이었고, 제빵소는 사회 통제의 장소로도 활용되었어요.
  • 노동, 이윤, 정책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함께 돌아갔어요.
    조례는 이종 사회화를 막으려 했지만, 노동과 경제 필요가 그걸 무너뜨렸죠.
  • 마지막으로, 이 산업은 전적으로 신용 거래 위에 세워졌어요.
    외상으로 밀가루 사고, 술이나 빵을 나중에 갚고—이것이 포토시 경제의 중요한 특징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