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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지역대학원(중남미학과)/라틴아메리카 역사

colonial latin america ch.6 The Social Economy 번역

식민지 사회의 발전

식민지 사회의 형성과 발전은 급격하고도 깊은 인구 및 경제 변화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정복으로 만들어진 초기의 단순한 사회 질서는 정복자, 초기 식민지 행정관, 성직자들이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적 구분은 더욱 복잡해졌다. 원주민 인구의 급감과 강제 이주, 수천 명의 유럽 이민자 유입,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발전, 인종 혼합 인구의 급속한 증가 등은 식민지 초기에 정립된 사회 범주와 경제 질서를 압도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사회 조직은 아메리카 식민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사회 모두는 귀족, 성직자, 평민의 세 계층으로 나뉘었으며, 귀족과 성직자는 *푸에로스(fueros)*라 불리는 세금 면제 및 사법 특권을 통해 평민과 구분되었다. 군대와 대학 같은 법인체도 특정 상황에서 자율적인 사법권을 행사했으며, 교회 또한 타 기관의 간섭을 거부하며 그 권위를 지켰다. 장인 조합은 구성원에 대한 상당한 통제권과 귀족이나 왕실 관료로부터의 독립성을 누렸다. 16세기 이베리아인들에게 이상적인 사회란 명확한 위계 질서가 있으며, 권력과 부, 지위가 상층에 집중된 사회였다. 이들은 인간의 평등을 믿지 않았고, 사회적 이동성을 증진시키려는 열망도 없었다.

이러한 신념과 제도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인정되고 때로는 강제되었지만, 유럽으로부터의 거리, 인종·민족·문화의 혼합, 식민지 경제의 불안정한 성과는 훨씬 더 유동적이고 복잡한 ‘카스트 사회(casta societies)’를 만들어냈다. 이 사회에서 인디언,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 혼혈인들은 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규정되었고 실제로도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재산이 많으면 피부색이나 외모와 관계없이 ‘백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정착 초기에는 정복자와 인디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상류층과 어울리며 유럽인과 혼인하기도 했다. 인종은 생물학적 기준보다는 재산, 혈통, 권력 혹은 반대로 가난과 조공 지위에 의해 정의되었다. 또한 언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 종교(기독교), 복장, 식습관 같은 문화적 요소도 인종과 민족 정체성 부여에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지위

남성 중심의 이베리아 세계에서, 법과 관습은 여성의 역할을 엄격히 제한했다. 정복자들과 그 후속 남성 정착자들은 종종 폭력적인 관계를 통해 원주민 여성에게 지배를 강요했다. 남성 성직자와 관료는 교회와 국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 상류층 여성과 중간계층 여성은 젊을 때는 아버지, 결혼 후에는 남편에 의해 통제되었고, 수녀원에 들어간 여성은 사제의 감시를 받았다. ‘체면 있는’ 또는 재산 있는 가정의 여성은 동행 없이 거리를 다니거나 시장을 보거나 일자리를 갖거나 남성과 단둘이 만나는 것이 금기였다. 소수의 부유하거나 도시 중산층 여성만이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과부가 되었을 때만 재산을 스스로 관리하거나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규범에 반항하고 가정을 탈출하거나 성적 규율을 거부한 여성은 수녀원, 병원, 보호시설 등으로 ‘감금’되었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여성의 경험은 달랐다. 가난한 자유 여성과 노예 여성은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다양한 사회·경제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도시와 마을에서 그들은 시장을 장악했고, 소규모 사업을 운영했으며, 농촌에서는 농부이자 목축업자로 일했다. 교회가 강조한 가족 통제 이상은 이러한 여성들의 기여를 가렸지만, 실제로 그들의 자본 투자, 노동, 기업가적 기술은 도시와 농촌 하층계층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했다. 많은 가정은 여성 가장이 이끌었고, 남성 가장의 수입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다.

 

경제, 신분, 문화

식민지 경제는 개인과 집단이 사회적 지위, 인종, 민족을 정의하고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장이었다. 문화와 경제 기회는 이러한 정의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즉, 유럽 이민자들은 크리올로, 인디언, 카스타들과는 다른 목표를 추구했다. 적절한 소득을 확보한다는 것은 단지 생계가 아닌, 계급과 인종에 따른 문화적 규범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야망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권 계층에서는 소득이 유럽산 또는 아시아산 고급 직물 같은 고가의 선택 소비재 구매를 가능하게 했다. 중간계층은 이 스타일을 최대한 모방하면서도,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구분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다. 빈곤층은 식량, 의복, 주거 등 가장 기본적인 생존 필요를 해결하려 애썼지만, 대부분의 가정에는 최소한 한두 개의 종교 성상이 존재했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경제의 구조, 특히 수출 부문의 구조적 불안정성은 모든 사회 계층의 취약성을 증대시켰다. 유럽산 직물을 수입하는 상인의 이익, 노새몰이꾼의 수입, 직공의 임금, 양목장의 대출 상환 능력은 모두 스페인 함대의 무역량, 식민지 은광의 생산성, 인구 변화에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변화하면 식민 사회 내 계층 간 소득과 기회의 분배가 요동쳤다.


엘리트 계층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브라질의 주요 부 중심지 간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단일한 식민지 엘리트 계층은 존재할 수 없었다. 대신 각 도시 중심과 그 주변 농촌 지역에서는 지역 엘리트가 정치·경제·사회·문화 생활을 지배했다. 은광 채굴 여부 등 특정 경제 활동의 유무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지역 엘리트에 대해 몇 가지 일반화는 가능하다.

이들은 목축업자, 플랜테이션 소유주, 광산업자, 상인, 고위 성직자, 관료가 혼합·상호 중첩된 집단으로, 귀족 가문, 성공한 사업가, 왕실에서 파견된 고위 인사들과의 혼인과 통합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대부분은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경제 부문에 걸쳐 활동했으며, 예컨대 어떤 성직자나 관리는 친척이나 친구를 전면에 세워 사업을 운영했고, 상인들은 대규모 농업 및 광산업에 투자했다. 직업보다는 부, 영향력, 가문, 사회적 연결망이 엘리트의 지위를 결정했다.

정복을 통해 원주민에 대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출생지 스페인인(페닌술라르)**이나 **포르투갈인(헤이노이스)**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했고, 이들의 아메리카 출생 자손인 **크리올로(스페인령)**와 **마좀보(브라질)**도 이 지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정복자와 초기 정착자 중 실제 귀족 가문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돈(don)'이나 '돔(dom)'이라는 귀족 칭호를 가진 자도 드물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군사 활동을 통한 사회적 상승을 주장했고, 2~3세대 후손들은 정복 참여를 근거로 귀족적 지위를 당연시하며 칭호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상의 귀족 계층(hidalgo 또는 fidalgo) 개념은, 유럽인이 인디언, 흑인 노예, 혼혈 및 서자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흥미롭게도 ‘돈(don)’이라는 칭호는 원주민 귀족에게도 부여되었는데, 이는 식민 행정당국이 이들을 세금 징수 및 강제노동 조직의 매개자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아메리카와 브라질의 가장 부유하고 권력 있는 식민지인은 이베리아 귀족을 모방하여 권위적 태도를 보였고, 호화로운 저택과 수행원을 거느리며, 유럽의 유행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귀족 칭호를 공식적으로 받은 사람은 드물었다. 스페인 왕실은 코르테스와 피사로에게만 후에 ‘후작’ 칭호를 수여했으며, 1750년까지 식민지 내에서 페루에는 90건 미만, 멕시코에는 27건의 귀족 칭호만이 부여되었다. 이마저도 대부분 고위 관료, 민병대 조직자, 국고에 큰 기부를 한 부유층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초대 귀족은 스페인 출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크리올로 후손에게 세습되었고,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귀족층은 점점 크리올로화되었다. 브라질의 설탕 플랜테이션 소유주도 포르투갈 귀족을 모방했지만, 공식적인 작위를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회에서 **혈통의 순수성(limpieza de sangre)**은 기독교 정체성, 특히 엘리트의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유럽에서는 유대인과 무슬림 조상을 배제하는 개념이었으나, 식민지에서는 아프리카 또는 인디언 조상도 포함되었다. 브라질에서는 "감염된 피", "혈통의 결함"이라는 표현으로 불리며, 엘리트 조직 및 귀족 가문과의 결혼에서 배제되는 기준이 되었다.

식민지 엘리트 내부의 부와 권력 관계는 장기적인 경제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인디언 인구의 감소는 에농코멘데로 계층의 몰락을 가져오고, 대신 스페인 관료 및 상인의 부상을 가져왔다. 17세기 포토시의 은 생산 감소는 광산업자에서 상인 채권자로 경제 권력이 이동했으며, 1695년 이후 브라질 금광 붐은 노동력 경쟁과 노예 가격 상승을 불러와, 설탕 산업에 큰 부담을 주었다. 이처럼 국내외 경제 변화는 식민지 사회 구조를 끊임없이 변화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엘리트들은 재산 다각화를 통해 위기를 관리하려 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성직자의 서자인 주앙 페이쇼투 비에가스는 설탕 수출, 와인 및 노예 수입으로 기반을 마련한 뒤, 자본을 가축 사육과 시장 농업 기반의 대지주 경제로 전환했다. 사카테카스의 은광업자 호세 데 케사다는 사망 당시 3만 마리의 양을 소유한 광대한 목장으로 자산을 옮겨 놓은 상태였다. 리마의 상인 후안 데 케사다 이 소토마요르는 국고 관리직을 매수해 관료 신분 확보를 통해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료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식민지의 교회와 국가 행정을 운영하도록 선발된 관료들은 대부분 막대한 개인 재산을 지닌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는 이들의 봉급과 물질적 혜택이 사회 상층에 가까운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예컨대 **리마 고등법원의 판사(oidor)**가 연간 받는 약 5,000페소의 봉급은, 보통 10만 페소의 자본 투자가 필요한 수준의 수입이었다. 하지만 가장 부유한 광산업자, 상인, 플랜테이션 소유주의 부에 비하면 이들 관료의 자원은 미미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고위 관료와 성직자들조차 물질적 박탈감을 느꼈고, 이는 공적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공공 자금을 유용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식민지에서는 신용 체계가 미비했기 때문에, 공적 자금에 접근할 수 있는 관료들은 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1630년, 리마 회계심사원(Tribunal de Cuentas)의 한 관리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식민지의 행정관들은 국고에 약 165만 페소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1717년 과테말라에서의 감사(visita)에서는 한 지방 회계관이 왕실에 3만 페소의 빚을 지고 있었고, 그 전임자도 4,000페소를 미상환 중이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관료들은 공공 자금을 민간 사업에 투자하거나 친인척에게 빌려주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행정 운영 관행은 이러한 부패를 부추겼다. 모든 수준의 관리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를 받았고, 식민지로의 이동과 가정 마련에 드는 비용 외에도, 많은 유럽인들은 임명 대가로 큰 빚을 지고 도착했다. 특히 17세기와 18세기 초에는 공직을 매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청탁 과정에도 거액이 소요되었다. 스페인의 경우, 1631년 이후 임명자는 **첫 해 봉급의 절반(media anata)**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이러한 재정적 부담은 부패를 유인했다.

많은 관직은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되었고, 그중 지방 행정관(corregidor) 직책은 상업을 통한 사적 이득이 가장 컸다. 봉급은 지역 간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부유한 지역일수록 매입가가 높았다. 예를 들어, 17세기 후반, 코치닐과 목화 생산지인 오악사카의 행정관 자리는 7,000페소 이상에 거래된 반면, 가난한 치와와 지역의 유사 직책은 700페소에 불과했다. 고위 관료도 불법적으로 상업에 참여했다. 1629년, 파야판(Popayán) 주교는 주지사 후안 베르무데스 데 카스트로가 지역 직물 무역을 독점하고 있다며 고발했다.

성직자들은 집단적으로는 세속 관료들보다는 덜 부패했지만, 자신과 가족의 물질적 이익을 추구했다. 대주교와 주교는 흔히 조카 등 친척의 출세를 도왔으며, 예를 들어 멕시코시티 대주교 알론소 데 몬투파르는 1555년 조카를 성가대장(maestrescuela)에 임명해 성당위원회의 반발을 샀다. 또 어떤 이들은 공개적으로 사업을 하기도 했는데, 1620년대 신스페인 대주교 후안 페레스 데 라 세르나는 궁전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성직자들은 십일조 징수권성사 행위에 대한 수수료를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 이는 종종 사회 하층민에게 큰 피해를 줬으며, 악명 높은 사례로는 1712년 치아파스의 주교 알바레즈 데 톨레도가 십일조 징수를 강화하려다 인디언 반란을 촉발시킨 경우가 있다.


상인 계층

어떤 계층보다도 엘리트와 긴밀히 연결된 집단이 바로 상인들이었다. 특히 멕시코시티와 리마의 상인 조합(consulado) 소속 스페인 도매상들은 신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권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지위는 16세기 초 스페인 정부가 만든 무역 독점 체계에 기반했다.

이런 특권적 상인들 간의 경쟁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일반적으로 식민지 수출품의 교환 가치를 통제하거나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페루와 신스페인의 광산 지역에서, 상인들은 수은과 필수 수입품 공급, 신용 제공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했다. 별도 금융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갱도 굴착이나 장비 구입을 위한 자금은 이들 상인에게 의존했다. 어떤 상인들은 은괴를 할인 구매하거나 주화 교환 수수료를 챙겼다. 

이들은 왕실 무역 정책의 보호를 받았지만, 개인 이익 추구와 경직된 체계 간의 긴장은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부유한 상인들은 밀무역에 자주 손을 댔다. 예를 들어, 1646년 멕시코 당국은 수많은 불법 은을 필리핀으로 보내는 상인들, 심지어 상인조합 전 대표까지 적발했다. 멕시코 상인들은 아카풀코를 통해 유럽 물품을 리마로 보내는 것을 반복적으로 금지법을 위반했다.

이들 도매상인은 소매시장도 통제했다. 소매점을 소유하거나 지방 도시에 친인척을 배치해 시장 가격 변동에 관계없이 이윤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수출 측면에서도 **행정관에게 신용을 제공하고 인디언 생산물(면직물, 코치닐, 코카, 카카오 등)**의 매입권을 우선 확보했다.

브라질, 베네수엘라, 리오데라플라타, 카리브해 지역 등에는 공식적인 상인조합이 없어, 상인들은 경쟁과 밀무역의 압력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브라질, 18세기 베네수엘라 등에서는 국가 공인 무역회사가 설립되면서, 상인들의 시장 지배력은 강화되었다. 이들은 단기 파트너십, 담합을 통한 가격 책정, 그리고 신용 부족 상황에서의 협력을 통해 경쟁 우위를 점했다.

대서양 전역에서 **유대인과 개종 유대인(신기독교인)**은 장거리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는 이들이 종종 종교재판의 박해 대상이 되었지만, 브라질에서는 더 많은 숫자의 신기독교인이 존재했고, 포르투갈 본국에서는 금지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30~1654년 네덜란드 점령기 페르남부쿠에서는 이들이 브라질 상업을 지배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통한 포토시 은광과의 밀무역을 주도했다. 일부가 네덜란드 점령기에 유대교로 복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전체 신기독교인 집단이 탄압을 받았다.

 

농촌 엘리트

엘리트 가문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 자산에도 투자하곤 했다. 식민지가 성숙기에 접어들면 많은 엘리트 가문은 **농업이나 목축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영지(hacienda, fazenda)**에서 부와 지위를 얻었다. 이들 중 다수는 봉건 영주의 삶을 살아가며, 막대한 부를 누렸고 수많은 노예와 자유민을 거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 엘리트에 비해 이들의 이해관계는 종종 종속적이었다. 대규모 농촌 기업은 신용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고, 수확기 이후에만 수입이 발생했기 때문에 나머지 기간의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대출이 필요했다. 여기에 가뭄, 병충해, 시장 가격 하락 같은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막대한 부채를 유발했고, 농촌 기업 자체의 생존을 위협했다.

따라서 농촌 엘리트는 식민지 시기 신용을 제공하던 주요 기관, 즉 교회와 상인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엘리트는 가문의 부와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마요라스고(mayorazgo, 스페인) / 모르가두(morgado, 포르투갈)’라는 토지세습 제도를 활용했다. 이 제도는 상속 재산의 분할이나 매각을 금지해 영지가 대대로 유지되도록 했으나, 실제로 이를 시행한 가문은 식민지 멕시코 전체에서도 100가구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식민지 사회의 시장 지향성 및 물질주의 성향을 반영하며, 스페인 왕실이 이 제도의 식민지 확대를 꺼렸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농장주들은 식량 시장을 조작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풍작이 들었을 때 인디언 공동체나 카스타 계층 농민들은 잉여 농산물을 시장에 판매할 수 있었고, 이는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대규모 자본 농장에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하시엔다 소유주(hacendados)**들은 도시 시장의 공급을 조절해 인위적 품귀 현상을 조성하려 했다. 소농들은 수확 직후 바로 판매해야 했지만, 하시엔다 소유주는 늦은 시점에 판매하거나, 흉년 시기까지 곡물을 저장했다. 일부는 기근이 닥칠 때까지 밀과 옥수수를 창고에 보관했다가 폭리를 챙겼다.

이에 **지방 시의회(cabildo)**는 식량을 직접 매입해 시립 창고에 보관하거나, 소매가 상한제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기근기 폭리는 흔한 현상이었다.


플랜테이션

플랜테이션은 주로 수출 시장을 위한 생산기지였고, 대개 열대 지역에 위치했으며, 노예 노동력에 의존했다. 플랜테이션은 은광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었고, 16세기와 17세기에는 브라질의 플랜테이션이 가장 부유했다. 그러나 인디언 인구 감소가 심각했던 지역—예: 카리브 해 연안, 페루 해안—에서도 플랜테이션은 지역 경제를 지배했다.

설탕 산업은 값비싼 제당 장비, 대규모 노예 인력을 필요로 했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플랜테이션 규모와 노예 수는 증가했다. 자본 접근성이 뛰어난 부유한 플랜테이션 소유주가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카카오나 담배는 자본 필요가 적었지만, 이들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플랜테이션 소유주들도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고, 브라질 태생 지주와 포르투갈 상인 간에는 경쟁도 있었지만, 설탕 산업의 불안정성, 높은 경영 리스크, 지속적인 자본 수요는 사업적 협력과 혼인 동맹을 장려했다.

식민지 기간 동안 유럽의 신대륙 생산물 수요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생산 증가 속도는 그보다 더 빨랐다. 담배는 카리브에서 파라과이로 확산되었고, 카카오는 브라질,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전역에서 생산되었다. 17세기 말~18세기, 프랑스·네덜란드·영국의 카리브 해 섬에서 등장한 자본 집약적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브라질 플랜테이션의 수익을 크게 잠식했다. 이에 따라 브라질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국내 시장을 지배하고 가격을 조절할 수 있었던 하시엔다 소유주와 달리,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던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가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심지어 부채 상환과 식품 부패 가능성 때문에 유리한 가격을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과 보호무역을 요청하게 되었다. 17세기 말, 베네수엘라의 카카오 플랜테이션은 스페인 제국의 무역 독점 정책 덕분에 멕시코 시장에서 안정적인 이윤을 보장받았다. 카카오, 담배, 설탕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경쟁 제거와 이윤 보호를 위해 독점권 확보를 추구했다.

 

도시 및 농촌의 중간 계층

식민 사회는 주로 유럽계 고위 관료, 성직자, 광산업자, 상인, 지주 가문들이 연결된 상류층 가계들에 의해 지배되었지만, 이베리아 제국의 지속은 훨씬 더 다수였던 중간 계층 인구의 충성심과 역량에 달려 있었다. 엘리트에게는 고객층 또는 시골뜨기로 치부되었지만, 이들 중간 계층은 제국 구조를 지탱하는 근육과 신경이었다. 상인과 행상으로서 대서양을 건너온 상품을 지역 소비자와 연결했고, 사제·교사·지식인으로서 가톨릭 신앙과 이베리아 언어의 보급을 담당했다. 전쟁이나 반란이 발생했을 때는 경찰과 군대의 지휘자, 세금 납부자로서 제국을 유지했다.

이민자들은 식민지 전 기간 동안 영향을 미쳤지만, 16세기와 18세기에 가장 많았고, 대부분은 중간 계층 직업군에 종사했다. 농촌의 소토지를 소유하거나 도시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성직자나 법률가, 공증인, 소관료, 점원, 선술집 주인, 노동 감독관, 기술자, 수공업자 또는 육체노동자로 일했다. 이들은 부유하지도, 사회적으로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출생과 인종적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이에 따른 특권 의식은 다른 계층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고향인 세비야, 리스본 등과의 가문 및 우정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사업·대출 등의 수단으로 삼았다. 출신이 어디든, 대부분의 이민자는 신대륙 태생의 이들과 자신을 구분지었다.


도시 중간 계층

도시 중간 계층의 상위에는 소규모 제조업자, 숙련 장인, 소매 상인, 중간 관료, 사제들이 있었다. 이 중 사제와 관료는 제도적 안정성과 꾸준한 수입 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다. 나머지 집단은 시장 상황의 불확실성에 따라 지위를 유지해야 했다. 이들은 상류층을 모방하며, 지위와 수입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노력했다.

숙련 장인들은 **조합(guild)**을 형성해 품질 기준, 노동 규칙, 견습 채용 기준, 훈련 방식, 제품 범위 제한을 자율적으로 설정했다. 이들은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인 집단으로서, 과도한 경쟁이 계층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도록 개인의 시장 자유를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길드 기반의 독점 구조는 유럽에서도 약화되는 중이었고, 식민지 환경에서는 더욱 유지되기 어려웠다. 멕시코시티와 리마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식민지 도시, 특히 브라질에서는 조합이 존재하지 않거나 약세였다. 노예와 강제 노동(특히 16세기의 인디언 노동)은 길드의 이념과 가치를 훼손했다.

유럽 이민자가 수공업에 종사하려는 비율이 낮아지면서, 스페인·포르투갈 장인들은 인디언, 카스타, 노예 견습생을 훈련시켰고, 이로 인해 식민지 수공업 사회는 인종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이며, 유럽보다 자유로운 관행을 갖게 되었다. 숙련 장인 다수는 값싼 노동력 확보를 위해 노예를 사용하거나 비숙련 임시 인력을 채용하기도 했다. 성공한 장인은 사실상 작은 제조업체 운영자였고, 일부는 **오브라헤(obraje)**를 운영하며 인디언·카스타 노동력에 의존했다. 대다수 장인은 도구를 소유했고 소규모 재고를 보유했지만, 가게나 집까지 소유한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원자재는 외상으로 구매했고, 고객에게도 외상을 제공해야 했다. 이러한 신용 관계는 불황기에 장인들을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다른 도시로 신용 회피성 이주를 감행하는 사례도 흔했다.


소매 상인과 행정관료

소매 상인들은 사업 규모가 천차만별이었다. 성공한 일부는 상인조합(consulado) 소속 부자들과 맞먹는 부를 축적했고, 빈곤한 상인은 동네 가게나 시장 노점 수준에 머물렀다. 대부분은 도매상과 연계된 중개자였으며, 공급과 수요를 예측하는 능력에 따라 수입이 결정되었다. 이들은 선박이 도착할지, 밀수품이 시장을 교란할지, 도난을 막을 수 있을지, 고객이 신용을 지킬지를 두고 끊임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소매상은 일반적으로 지리적으로 제한된 시장에서 활동했으며, 단일 도시의 한 구역만 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새로운 시장 진입이나 고객 외상 확대는 위험이 크므로, 대신 부동산, 술 판매, 도박장 운영 등으로 수익 다변화를 시도했다.

소관료, 세속 사제, 수도자들은 수입은 적지만 지위는 안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중간 관료는 후원자 네트워크를 통해 임명되었으며, 직위에 오른 뒤에는 엘리트 가문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지위를 강화하려 했다. 혼수와 유산이 주요 목표였다. 많은 이들은 사례금과 뇌물로 수입을 보완했고, 일부는 상업 투자에도 나섰다.

16세기 말까지 스페인 아메리카 도시에는 수도회 소속이 아닌 **세속 사제(secular priest)**가 많았고, 이들은 본당을 경쟁이나 후원을 통해 획득해 소득을 확보했다. 하지만 세례·혼인·장례 비용은 너무 비싸다는 민원이 잦았다. 부유한 본당은 사제가 부사제에게 성사 행위를 위임하고, 본인은 다른 사업에 전념할 정도였다. **채플 재단(capellanía)**을 통해 유산으로 일정 수입을 얻는 사제도 있었다. 수도자들 또한 도시 및 농촌 재산 소유자로, 실제로 많은 사업에 관여했다. 예컨대 브라질 사우바도르의 카타리나 데 텔레스 바헤투 수녀는 임대 부동산, 노예 12명, 제과 사업 등을 소유했으며, 그녀의 사망 시 유산은 수녀원 연간 수입의 절반에 달했다.

 

식민 사회의 기반층 (하층민)

차별적 법률, 편견, 인종을 겨냥한 세금(예: 인디언 조공), 강제노동 제도(예: 미타)는 원주민, 흑인 노예 및 자유 흑인, 카스타들에게 엄청난 제약을 가했다. 도시와 농촌의 빈민들은 식민 라틴아메리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들의 삶은 물질적 결핍과 폭력으로 가득했다. 이들의 노동은 농산물을 수확하고 가축을 돌보며, 은과 금을 채굴·정제하고, 직물을 생산하고, 상품을 유통시키는 데 쓰였다. 이들은 시장 여성, 부두 노동자, 병사, 일용직 노동자, 거지, 매춘부, 부랑자로 도시와 마을의 공공 공간에 존재했다. 또 가장 흔한 감옥 수감자, 강제징집 대상, 채찍과 낙인 같은 가혹한 체벌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계층의 소득 수준, 생활 조건, 법적 제약, 사회 이동 가능성을 일반화하긴 어렵다. 일정한 틀은 없었으며, 세습 인디언 지도자 중에는 토지와 가축을 보유한 고소득자도 있었고, 일부 노예는 해방을 이루었으며, 행상이나 노동자로 출발한 이들이 건물이나 주택을 구매하기도 했다. 지역적 차이도 컸는데, 예를 들어 남부 안데스에서는 미타가 여전히 원주민 삶을 교란하는 반면, 멕시코 중부의 원주민은 강제노동에서 대부분 벗어났다. 또 여성의 해방률이 남성보다 높았던 것처럼, 성별에 따라 도전과 기회는 달랐다.


농촌 하층민

농촌에서는 노동 강제화가 보편적이었다. 미타·레파르티미엔토, 조공의 금전화, 강제 물품 구매는 인디언에게 막대한 부담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지주·광산주·오브라헤 소유주의 이익을 보조했지만, 그 대가로 받은 임금은 생계유지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브라질에서는 플랜테이션이 아프리카 노예의 강제노동에 의존했고, 다른 지역의 자유 농업 노동자들(인디언, 자유 흑인, 카스타 등)도 토지를 구매하거나, 지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도시 하층민

도시 경제는 더 복잡했고, 보다 다양한 하층민의 기회를 제공했다. 상대적으로 상위에는 숙련공, 시장 상인, 행상인, 하인, 병사, 선원이 있었고, 하위에는 거지, 도둑, 매춘부, 나병 등 병에 걸린 빈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거리나 뒷방에서 잠을 자며, 매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분투했다. 실직이나 질병은 숙련 노동자조차 구걸로 내몰았다.

도시 노예들 중 일부는 자유 노동자보다 물질적 조건이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 노예라는 법적 지위, 인종차별 등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가정에 속한 노예들은 상당히 나은 생활을 했고, 자유 카스타 노동자들보다 조건이 나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 노예는 독립적으로 일하고 일부 재산을 소유하며 자유를 구입할 수 있었고, 특히 여성 노예들은 시장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브라질에서는 도시 시장을 여성 노예들이 주도하기도 했다.


노동 조건과 임금

도시 임금 노동자와 자유 농촌 노동자, 오브라헤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출부터 일몰까지 노동했다. 월~토요일이 일반적인 근무일이었지만, 종교 및 세속 축일이 자주 노동을 중단시켰다. 도시 노동자는 점심·간식 시간, 때로는 고용주가 제공한 식사도 있었다. 견습공과 일부 직공은 고용주 뒷방에 거주했다. 이러한 현물 보상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 수요와 전통적 임금 관습(jornada)에 의해 결정되었다. 특히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장기간 거의 변하지 않았고, 숙련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수만이 연간 52주간 6일 근무를 할 수 있었고, 대부분은 정기적인 실직과 불안정을 경험했다. 장기 실직이나 질병은 극심한 빈곤으로 이어졌고, 일부 길드는 의료지원을 제공했지만, 대부분은 교회의 자선에 의존했다. 여성들은 대부분 수공업에서 제외되었지만, 집에서 생산한 물품 판매나 직물 오브라헤 노동자로 실질적으로 경제활동을 했다.


병사, 상인, 거리 빈민

식민지 도시에는 항상 병사, 공무 보조원, 선원 등이 있었다. 이들은 임금이 매우 낮았고, 대부분 부업을 통해 생계 보조를 해야 했기 때문에, 도시 노동시장에 참여해 임금을 하락시켰고, 이에 따른 현지인의 불만도 컸다. 스페인 병사 중 일부는 임금이 체불되면 구걸에 나섰다.

소규모 행상인, 시장 노점상은 임금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저소득과 불안정성을 겪었고, 재고는 도난·부패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들은 공식 길드나 고용체계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임기응변에 의존했고, 극소수만이 물질적 안정을 이루었다. 많은 경우, 행상에서 도둑 또는 거지로 전락하는 일이 예사였다.

모든 식민지 도시는 매춘부, 도둑, 거지도 수용했다. 부유층은 이들의 존재로부터 보호받길 원했지만, 보호 장치는 거의 없었다. 이들은 극심한 결핍 속에 살아갔지만, 드물게 일부는 일시적으로 높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예컨대 1631년 리마에서는 4명의 카스타 여성이 매춘 업소를 운영하며 성황을 누렸지만, 여론의 비판으로 인해 ‘타락한 여성 보호소’로 이송되었다.


빈곤과 자선

가톨릭 문화는 빈곤과 거지를 사회적 이상현상이 아닌 신의 섭리로 간주했다. 교회는 가난한 자를 기독교적 형제로 대하며, 그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것을 강조했다. 수도회는 예수의 가난을 모방하며 직접 구걸했고, 종교단체(cofradías)는 장례 후 또는 축일에 거지에게 시주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도시 교회·공공건물 앞에 거지들이 밀집하는 모습은 식민지 도시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거지와 도시 빈민은 도축장 찌꺼기, 빵집의 썩은 빵, 부유층의 남은 음식으로 생존했다.

 

원주민 (Indians)

식민 사회가 성숙함에 따라,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의 고도로 도시화되고 계층화된 원주민 사회 내부의 문화 및 계급적 차이는 점차 압축되거나, 경우에 따라 사실상 말소되었다. 브라질, 칠레, 리오데라플라타, 남아메리카 카리브 해 지역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착민들이 소규모 마을 문화나 반정착 원주민 집단을 접했고, 이들을 군사적 적 또는 노동력 원천으로 보았다.

원주민에 대한 문화적·사회적 동일시의 압축은 바로 이 정복 초기에 사용된 ‘인디언(Indian)’이라는 용어를 통해 시작되었다. 이 용어는 처음에는 인종적 표현이었지만, 이후에는 **문화적 개념이자, 스페인 왕실이 정의한 조세 범주(fiscal category)**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정책은 정의 상 불의를 줄이기 위한 것이든, 왕실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든 간에, 이와 같은 범주화를 통해 전통적 문화와 계급의 구분을 흐리게 했다. 예를 들어 멕시코에서는 조공 부과가 토지 접근 권한 유무에 따른 전통적 평민 구분을 제거했고, 페루에서는 야나코나(yanaconas)가 아율루(ayllu) 구성원보다 나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스페인인에게 고용되었다.

카리브 해 식민지의 인구 붕괴에 충격을 받은 스페인 왕실은, 초기에는 본토에서 인종 격리 정책을 추진했다. 선교사를 제외한 스페인인과 카스타들은 인디언 마을 출입이 금지되었고, 나중에는 엔코멘데로조차도 조공을 받는 원주민 마을에 들어가는 것이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공학적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질병, 재배치, 시장경제의 팽창은 원주민의 유럽인과의 접촉 증가로 이어졌고, 전통 문화는 점차 해체되었다.

초기 정복자와 왕실은 원주민 귀족층의 권위를 인정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기존 귀족 가문 출신의 포로를 이용해 지역을 통제하려 했으나, 이는 멕시코에서 빠르게 실패했고, 마지막 잉카 후계자는 1627년 스페인에서 가톨릭 귀화인으로 사망했다. 일부 스페인인들은 고위급 인디언 여성과 결혼해 조공과 특권을 주장했으며, 그 결과 2세대부터는 중앙 멕시코와 페루의 원주민 귀족은 혼혈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는 스페인화되었다. 브라질의 원주민들은 정치조직과 경제 구조가 스페인 제국의 식민 질서와 덜 호환되었기 때문에, 정착민과의 결혼도 드물었고, 몬테수마나 아타우알파 같은 고귀한 혈통의 여성 후계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일부 인디언 귀족 계층은 한때 스페인에 의해 우대되었으나, 그 권위는 점차 약화되거나 배제되었다. 멕시코 계곡의 테파네카 족 귀족정 체제의 해체가 그 예시다. 1526년 후안 데 구스만 이쏠린끼가 즉위할 당시, 그는 막대한 재산과 400명의 시종, 다양한 곡물·조미료·나무 등의 공납과 노동력을 받았으나, 그의 손자는 코르테스의 아들이었던 발레 후작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공납 노동에 대한 법적 보호를 상실했다. 결국 1575년경 그의 후손은 시종 51명과 연간 23페소의 공납만을 유지했고, 18세기 말 그의 직계 후계자는 직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스페인 감옥에서 빈곤 속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공동체가 식민 행정과 조세·노동 체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지역 지도층은 살아남았다. 멕시코의 카시케, 유카탄의 바탑, 안데스의 쿠라카 등은 조공 징수 및 미타 조직을 담당했고, 이들 다수는 전통 귀족 출신이었지만, 유능한 평민이나 식민지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자들이 이들을 대체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반 인디언보다 사유지와 가축을 보유했고, 조공과 미타에서는 면제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이와 같은 세습 원주민 지도층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식민 행정과 노동 동원 체계의 중개자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문화 중개자 계층은 점점 더 히스패닉화되었다. 예컨대 유카탄의 페르난도 우스는 세습 바탑에서 인디언 총독으로 승진했고, 스페인 총독의 통역관이자 고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스페인 법정을 활용해 엔코멘데로, 토지 소유주, 관리, 성직자에 맞서 개인 또는 공동체의 권익을 주장하기도 했다. 페루의 잉카 후예들은 미타 면제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법정에 갔고, 쿠라카 지위를 둘러싼 선출 분쟁도 법정에서 진행되었다. 교회와 관련된 코프라디아, 교회 성가대장, 교사, 조수 같은 역할도 전통 귀족 가문이 독점했다.


전통 토지와 법률 활용

원주민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요소는 전통 토지권의 유지였다. 인디언들은 스페인 법률 제도를 빠르게 이해했고, 특히 행정 중심지나 식민 도시 근처에서는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했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멕시코 중부의 나와틀어 사용 원주민 공동체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정복 이전의 토지 분배 관행 또는 상속 연속성을 근거로 권리를 주장했고, 17세기에는 매매증서나 유언장과 같은 문서 자료를 통해 법정에서 소유권을 증명하려 했다.


젠더 관계의 변화

스페인 식민 사법과 사회 규범은 원주민 공동체의 젠더 질서를 남성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정복 이전의 멕시코와 안데스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병렬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식민지 시기에는 가부장적 핵가족 모델이 확산되며, 여성은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그 결과, 원주민 사회 내부의 가족 관계와 성역할은 식민지 체제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순응, 저항, 언어, 이주

농업에 기반한 대규모 원주민 인구 지역에서는 반란보다는 적응과 순응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안데스, 마야 지역, 뉴 스페인 북부 국경지대 등에서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반란과 저항도 꾸준히 발생했다.

원주민이 전통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식민 경제와 문화에 적응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주요 지표는 언어 변화이다. 예컨대 멕시코 중부의 나와틀어 사용 원주민은, 1540년대까지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이후 100년간 스페인어 명사를 대거 수용했으며, 1650년 이후에는 이중언어 사용자 증가로 인해 스페인어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인구가 감소한 지역에서도 일부 언어는 살아남았다. 유카탄에서는 마야어가 인디언, 메스티소, 파르도 사이에서 공통 언어로 남았고, 파라과이의 과라니어, 브라질 상파울루의 투피어도 생존했다.


공동체 해체와 재편

대다수 원주민은 식민 질서를 참기 힘든 부담으로 느꼈다. 정복 직후에는 그들의 노동과 생산물이 스페인·포르투갈 인구와 잔존 원주민 귀족층을 지탱했지만, 인구가 감소한 후에는 노동과 조공의 요구가 공동체 결속을 약화시켰고, 많은 이들이 이주했다. 이들은 스페인 농장, 목장, 타 원주민 공동체로 이동하거나, 혹은 식민 행정권 밖의 ‘야생지’로 도피했다. 이주자는 초기에는 자신의 고향 공동체와 연계를 유지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이주지에 정착했고, 결과적으로 스페인 사회에 동화되었다. 예컨대 1700년경, 키토 관구의 원주민 절반 이상이 고향 공동체 밖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주는 도시와 타 원주민 공동체의 노동자층으로 흡수되는 주요 통로였고, 결과적으로 식민 노동계급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브라질에서는 초기 해안 식민지화와 내륙 노예 사냥의 결과로 원주민이 후퇴했고, 스페인령 식민지에서와 같은 미타·레파르티미엔토 제도 부재는 브라질 도시에 원주민의 비율이 낮은 결과를 낳았다.


결론

원주민 공동체는 식민지 시대를 변형된 형태로 살아남았다. 인구 손실과 시장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동 토지 소유는 상당 지역에서 유지되었고, 지방 행정과 종교 조직 내 역할도 일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정복 이전 농업 공동체의 풍요와 활력은 소멸되었고, 그 자리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빈곤한 농촌 마을(peasant villages)**이 대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