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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지역대학원(중남미학과)/라틴아메리카 역사

colonial latin america ch4. Population and Labor(식민지 라틴아메리카 인구와 노동) 번역

식민지 인구 변화

스페인과 포르투갈인의 도착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원주민들에게는 유럽인의 정복과 정착이 인구 재앙을 촉발시켰다. 반면, 정복 이후 신세계에 정착한 적은 수의 이베리아인들은 이민과 몇 년 안에 자연 증식을 통해 급격히 그 수가 증가했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은 식민지 유전자 풀에 세 번째 인종 집단을 추가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와 그 후손들이 인구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유럽인, 인디언, 흑인 사이의 자유롭거나 강제적인 성적 결합은 새로운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낳았다. 이들은 식민지 시대 전체를 통해 수와 중요성이 증가하였다.

원주민 인구 감소, 유럽인 이민, 아프리카 노예 무역, 그리고 새로운 혼혈 정체성의 발달은 지역에 따라 상대적인 중요도가 달랐다. 도시와 농촌 지역은 일반적으로 인종 구성, 인구 증가율 또는 감소율, 심지어는 민족 정체성의 정의조차도 상당히 달랐다. 특정 지역에서는 전염병 발생이나 금과 은의 발견 등 새로운 경제 기회가 내부 이주 및 이민에 극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원주민 인구 (The Indian Population)

이베리아인의 도착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구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학자들의 추정치는 800만에서 1억 명 이상까지 다양하다. 각 주요 지역별 인구 추정치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멕시코 중앙 지역의 인구가 500만 명 미만이었는지, 2,500만 명을 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안데스 지역은 300만, 혹은 3,000만 이상이었다는 의견이 존재하고, 중앙아메리카의 경우 100만 미만에서 1,000만 이상까지 추정이 갈린다. 브라질도 100만 명에서 600만 명 이상까지 추정치가 다양하다. 그러나 이베리아인의 도착 이후 원주민 인구가 급감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원주민 인구 규모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제한된 수의 불완전한 자료에 근거한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고고학 연구로, 이는 접촉 이전의 주거지, 매장지, 토지 이용 및 정착 양상, 사회 구조, 토착 기술 등을 살펴보지만,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유럽인들이 남긴 문헌 자료에는 정복과 초기 정착에 참여한 이들의 인구 추정, 노동과 조세 목적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당국의 기록, 초기 인구 조사, 세례와 매장의 교회 기록 등이 포함된다. 다만 포괄적인 인구 조사 자료는 없다.

일부 학자들은 조세 대상자 명부나 개종자 수 등의 자료를 시작점으로 삼아 가구 또는 가족 단위 인원을 곱해 정복 이전 인구를 추정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전염병의 사망률을 가정하고, 이후의 인구 수치에서 역산하기도 한다. 어느 방식이든 본질적으로 신뢰도가 낮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스페인 국왕이 세금 제도를 개혁한 이후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신뢰도 높은 인구 추정이 가능해졌다.


질병 (Disease)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의 급감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복 과정에서의 생명 손실, 물리적 파괴, 농업 및 교역의 붕괴는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착민에 의한 학대는 오랜 복지 체계와 상호 부조 제도를 파괴하며 사망률을 증가시켰다. 식민 정부의 강제 노동 제도는 가족과 친족 구조를 약화시켜 출산율을 낮추고 영아 사망률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물리적, 문화적, 심리적 충격은 원주민 사회를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무의식적으로 전파한 전염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게 만들었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치명적인 전염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천연두는 멕시코에서 멕시카(Mexica) 정복 이전에 도달하여, 스페인이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할 때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이 질병은 남부 멕시코를 거쳐 중앙아메리카를 관통하며 1525년경 잉카 제국 북부에 도달했다. 홍역은 1530년대 초 신스페인과 중앙아메리카에 나타났고, 1540년대 중반 중앙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에는 코피와 안구 출혈을 동반한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았다. 과테말라의 한 스페인 정착민은 국왕에게 “신께서 인디언들에게 그러한 병을 내려 네 명 중 세 명이 죽었다”고 썼다. 30년 후 또 다른 유행병, 아마도 장티푸스나 흑사병,이 같은 지역을 강타하여 다시 수만 명 이상을 죽였다. 1750년까지 중앙아메리카에서는 5차례의 대규모 유행병이 더 발생했다.

1540년 이후 안데스 지역은 반복적으로 전염병을 겪었다. 1546년경 장티푸스나 폐렴성 흑사병이 인구의 약 20%를 사망하게 했고, 1550년대에는 홍역, 천연두, 인플루엔자가 유행했다. 17181720년 천연두 유행으로 안데스 지역 인구는 최저치를 기록했다. 브라질에서는 15621565년에 천연두가 확산되었고, 리스본에서 온 배를 통해 바이아에 유입되었다. 수개월 만에 근처 예수회 선교소에서 3만 명의 인디언이 사망했고, 이후 병은 페르남부쿠에서 상비센트까지 퍼졌다. 이후 17~18세기 동안 아프리카 노예 무역으로 인해 전염병이 이어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신세계 각 지역에서 원주민 인구 감소의 시기와 규모가 달랐음을 보여준다. 어떤 지역에서는 원주민들이 질병에 대한 면역을 획득하며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지만, 카리브 제도와 같은 지역에서는 정복과 질병의 영향으로 사실상 원주민이 전멸하였다.

 

지역별 인구 변화 (Regional Population Changes)

가장 광범위한 인구학적 연구는 멕시코 중부, 즉 테우안테펙 협곡에서 아즈텍 제국의 북부 경계에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드로 W. 보라(Woodrow W. Borah)는 이 지역의 인구에 대한 추정치를 제시했다(표 4.1 참고). 이 표의 수치는 추정치일 뿐 정확한 인구 수는 아니며, 1568년 이전의 수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1518년의 인구를 2,520만 명보다는 1,000만에서 1,300만 명 사이로 추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 인구학자들은 코르테스의 도착 이후 원주민 인구가 급속히 감소했으며, 17세기 중반에는 최저치에 도달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1650년 이후 원주민 인구는 점진적인 회복세에 들어서며, 간헐적인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한 주기적인 감소를 제외하면 식민지 시대 말까지 계속해서 증가했다.

멕시코에서의 인구 감소는 모든 지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인구 손실은 열대 해안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이 지역들이 스페인 도착민과의 접촉이 잦았고, 덥고 습한 기후가 질병의 확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의 원주민 인구는 회복되지 못한 반면, 보다 온화한 내륙 고지대에서는 17세기 중반부터 회복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완만한 증가세를 보였다.

멕시코 계곡(Valley of Mexico)의 경우, 정복 전 인구는 약 150만에서 290만 명 사이로 추정되며, 1570년에는 약 32만 5천 명으로 줄었다. 코르테스와 함께 온 스페인인 중 한 명인 베르나르디노 바스케스 데 타피아(Bernardino Vázquez de Tapia)는 테노치티틀란 포위 당시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1650년에는 계곡의 인구가 약 7만 명으로 최저치를 찍었고, 이후 1740년대에는 약 12만 명, 1800년경에는 약 27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신스페인 전체 역시 멕시코 계곡의 인구 흐름과 비슷한 경향을 보였으며, 원주민 인구는 17세기 초 최저점을 지나 18세기 말에는 약 370만 명으로 증가했다.

유카탄 지역의 인구 흐름은 멕시코 중부와는 달랐다. 스페인이 도착하기 한 세기 이상 전에 도시 중심의 사회가 붕괴하고, 전쟁과 재난 등이 발생하면서 이 지역 인구는 이미 감소하고 있었다. 이후 스페인의 정복과 새로운 질병의 유입으로 그 감소가 가속화되었다. 1528년 유카탄의 인구는 약 80만 명으로 추정되며, 1550년에는 24만 명, 1605년에는 18만 5천 명으로 감소했다. 이후 인구 회복세가 이어졌으나, 1645년 또 한 번의 전염병 유행으로 다시 인구가 감소했고, 1740년에 새로운 최저점을 찍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가 끝날 때까지 유카탄은 인구 증가세를 이어갔다.

중앙아메리카는 스페인인들이 진입하기 전부터 전염병이 토착 무역로를 통해 유입되어 고지대 인구가 약 3분의 1까지 감소했다. 이 지역의 인구는 1520년 기준으로 약 225만~500만 명으로 추정되며, 1570년에는 50만 명으로 줄었다. 1532년에 한 스페인인은 “홍역이 이 땅을 휩쓸어 인디언이 전혀 남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후의 전염병 대유행은 인구를 더욱 감소시켰다.

페루 역시 유럽인의 도착 이후 원주민 인구가 급격히 감소한 지역이다. 최초의 천연두 유행은 1524년에서 1527년 사이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블 데이비드 쿡(Noble David Cook)은 1520년 페루의 인구를 약 900만 명으로 추정하며, 1570년에는 130만 명, 1630년에는 60만 명까지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초기 인구 붕괴는 인구가 밀집된 해안 저지대에서 발생했고, 북부 고지대에서도 상당한 인구 감소가 있었다. 산악 지대의 흩어진 공동체는 홍역, 천연두, 장티푸스 등의 유행을 어느 정도 견뎠지만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멕시코와는 달리 페루의 인구는 18세기 초에야 최저점을 찍었으며, 1720년 이후 회복세를 보이며 18세기 중반에는 약 61만 명, 1800년경에는 약 70만 명에 이르렀다.

콜롬비아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동부 안데스 지역의 툰하(Tunja) 지방에서는 1530년대 중반에서 1630년대 중반 사이 인구의 약 80%가 감소했다. 동쪽의 베네수엘라도 50~75%의 감소를 보였다. 에콰도르는 초기 인구 감소가 매우 급격했지만, 16세기 말에는 회복세가 시작되었고, 17세기의 전염병 유행은 일시적인 타격에 그쳤다.

브라질의 경우, 1500년경 원주민 인구는 100만150만 명에서 500만600만 명까지 다양한 추정이 있으며, 존 헤밍(John Hemming)은 각 부족 단위 인구를 분석하여 총 240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유럽인의 도착 이후 원주민 인구는 감소했다.

 

도피 및 강제 이주 (Flight and Forced Migration)

원주민 인구의 참담한 감소는 이 복잡한 문화적·사회적 변화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정복의 군사적 약탈을 피해 수만 명의 원주민이 보다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했고, 이러한 이주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착민의 정착이 확대되면서 가속화되었다.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집중되는 기존 원주민 중심지에서 벗어나 시골로 흩어졌으며, 이로 인해 선교 활동과 강제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졌다. 전염병과 이주로 인해 발생한 행정적·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성직자들과 식민 당국은 원주민을 보다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로 집단 이주시켰다.

스페인은 이러한 생존 원주민 인구를 모으는 정책을 콩그레가시온(congregación) 또는 **레두시온(reducción)**이라 불렀으며, 이는 1540년대 중앙아메리카, 1550년대 유카탄, 그리고 멕시코 중부에서는 두 차례(1550년대와 1593~1605년)에 걸쳐 시행되었다. 각 지역에서의 과정은 유사했다. 소규모 주변 마을은 더 큰 공동체로 병합되거나, 기존 마을 여러 곳이 완전히 새롭게 조직된 정착지로 통합되었고, 원래의 마을은 파괴되었다. 때로는 큰 원주민 공동체 전체가 인근의 새로운 위치로 이주되었고, 그곳에는 스페인식 격자무늬 도시 구조가 따라 설치되었다. 이러한 강제 이주는 곧바로 식민 당국이 토지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고, 심지어 즉각적인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정착민 확장의 기반이 되었다.

페루에서는 1560년대 초기의 이주 정책이 실패했다. 그러나 부왕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의 강력한 통치 아래, 남부 페루에서는 최대 150만 명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레두시온(reducción) 이 시행되었다. 그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스페인식 도시로 원주민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서는 200개 이상의 마을을 단 39개의 도시로 통합했고, 어떤 경우에는 18개의 마을이 하나로 합쳐졌다. 와로치리(Huarochirí) 지역 원주민들은 전통적 거주지를 유지하고자 했으나, 끝내 스페인 당국은 이 지역의 100여 개 소규모 정착지를 1,000~1,700명 규모의 17개 마을로 통합시켰다. 그러나 20년 이내에 이 지역 주민들은 전통적인 거주 형태를 다시 회복했다.

브라질에서도 포르투갈이 유사한 정책을 시행했다. 예수회는 개종과 문화적 관행(예: 식인 풍습, 일부다처제)의 제거를 목적으로, 작은 마을에 흩어져 있던 인디언들을 **알데이아(aldeia, 선교 공동체)**라는 더 큰 공동체로 이주시켰다. 1557년 두 곳뿐이던 알데이아는, 포르투갈 총독 멤 데 사(Mem de Sá) 치하에서 1562년까지 11곳으로 늘었고, 인구는 약 3만 4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제 이주는 오히려 전염병에 대한 인디언들의 취약성을 증가시켰다. 1560년 이후 브라질에서는 흑사병과 천연두가 유행했고, 한 예수회 지도자는 “지난 20년 동안 바이아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믿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법과 관행은 심지어 성직자가 감독하는 마을의 인디언들을 정착민에게 강제 노동력으로 배정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이는 손실을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인디언들은 알데이아를 기피하게 되었고, 한 관찰자는 "예수회는 한때 50개 이상의 알데이아를 관장했으나 지금은 세 곳도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러한 억압적 상황 속에서 많은 원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이주는 개인, 가족, 때로는 공동체 단위로도 이루어졌고, 지역에 따라 규모도 달랐다. 예컨대 유카탄에서는 중앙 멕시코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유카탄에서는 식민 당국의 강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카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스페인 당국이 계획한 콩그레가시온 마을 바깥에 거주했으며, 상당수는 식민지의 통제를 피해 미개척지로 도망쳤다. 또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원주민 공동체의 무거운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근 지역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들은 세금과 노동 의무로부터의 일시적 해방을 추구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도착 이전부터 **야나코나스(yanaconas)**라는 세습 노동자 계층이 존재했다. 이들은 특정한 쿠라카(족장), 공동체, 아이유(ayllu, 씨족 단위)와는 무관하며 국가에 직접 봉사하는 계층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스페인에 협력하거나 그들의 농장에서 일하는 안데스 원주민들이 야나 또는 야나코나스로 불리게 되었고, 이들은 빠르게 히스패닉화되었으며, 고향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스페인 식민 경제로의 통합을 의미했다.

가장 가혹한 노동 의무는 **미타(mita)**였다. 이는 원래 안데스 지역에서 존재하던 상호 노동 교환 제도였지만,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를 강제노동 제도로 바꾸어 채광, 농업, 방직, 기타 산업에 동원했다. 가장 악명 높은 미타는 포토시(Potosí) 은광에서 일할 13,000명의 노동자를 매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인근 원주민 남성의 7분의 1이 7년에 한 번 1년간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그럼에도 일부는 귀향 대신 임금노동자로 은광에 남기도 했다. 미타는 본질적으로 아내와 자녀가 동반하는 이주를 포함하였고, 이를 회피하려는 수천 명이 고향을 떠났고, 결과적으로 야나코나스가 증가했다.

같은 시기 또 다른 자발적 이주 계층인 **포라스테로스(forasteros, 낯선 사람 또는 외지인)**도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아이유를 떠나 다른 원주민 공동체로 이주한 사람들로, 조세 부담은 더 적고 미타 의무에서도 제외되었다. 야나코나스와 포라스테로스 인구가 증가하면서 전통 공동체에 남은 사람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포토시 은광으로 더 자주 복귀해야 했다. 1680년대 초까지 상부 페루의 원주민 인구는 1570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생존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주지 및 혈연 구조가 완전히 변형되었다. 포토시 미타 대상 16개 주에서 원주민 인구의 절반이 야나코나스 또는 포라스테로스로 분류되었고, 미타 의무가 없던 인접 14개 주에서도 약 4분의 3이 포라스테로스로 분류되었다. 이는 스페인의 가혹한 미타 의무와 조세가 원주민 공동체에 얼마나 큰 압력을 가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베리아인의 인구 (The Iberian Population)

식민지 시대 동안 이베리아인의 인구는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이민이 초기 성장의 주요 원인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식민지 내 이베리아 여성의 수가 증가하면서 자연 출산이 인구 성장의 중심 동력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인구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17세기 2사분기부터 아메리카로 향하는 선박 수가 줄어들면서 이민자 수도 점차 감소했고, 이는 최소한 1720년까지 이어졌다. 그 이후 유럽계 스페인인의 이주는 다시 증가했으나, 1550~1650년 사이의 정점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506년부터 1699년까지 스페인에서 출항한 선박에 관한 정보를 기반으로 한 표 4.2는 당시 이주 규모를 보여준다. 소수의 외국인, 주로 포르투갈인이 스페인 식민지로 이주했으며, 스페인 국왕은 항상 이민을 엄격히 규제하려 했다. 신교도, 유대인 후손, 무어계 개종자, 집시 등은 법적으로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이주할 수 없었으나, 소수는 몰래 입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이민의 역사는 리스본 대지진(1755)으로 인해 기록이 대부분 소실되어 알려진 바가 적다. 1584년 평정된 브라질 해안 지역의 인구는 약 5만 7천 명이었고, 이 중 백인은 약 2만 5천 명이었다. 1600년경 전체 인구는 약 15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중 3만 명이 백인이었다. 한 세기 후 브라질 정착지 인구 중 약 10만 명이 백인으로 추정되며, 여기에는 아메리카 출생 백인과 인디언 혼혈 백인도 포함되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보다 여성 이민자가 적었기 때문에 자연 증가율도 낮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설탕 산업과 광산 붐을 계기로 브라질로 이주했다. 이 두 산업은 상류 및 중산층 출신 이민자의 수를 증가시켰다. 18세기 초, 매년 약 3,000~4,000명이 주로 북부 지방에서 새롭게 개발된 브라질의 광산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민 규모가 커지자, 1720년 포르투갈 국왕은 이민을 제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스페인 식민지로의 초기 이주자는 대부분 탐험, 정복, 정착에 참여한 젊은 남성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모험가적이며 숙련되지 않은 젊은 남성은 점차 배제되고, 대신 장인, 전문직 종사자, 행정관, 성직자, 하인과 수행원, 여성 및 아동이 이주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 여성의 비율은 거의 두 배로 증가했으며, 관료, 성직자 및 숙련 노동자도 점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주자의 대부분은 안달루시아와 에스트레마두라 출신이었으며, 1600년까지는 전체 남성 이주자의 5분의 1, 여성의 5분의 2, 상인의 절반이 세비야 출신이었다.

16세기 스페인 정착민의 가장 많은 수는 멕시코에 이주했으며,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페루와 상페루(현재의 볼리비아)는 약 4분의 1, 앤틸리스 제도·누에바 그라나다(현재의 콜롬비아)·티에라 피르메는 또 다른 4분의 1, 리오 데 라 플라타와 중앙아메리카는 약 10분의 1을 차지했다. 나머지 이민자들은 칠레, 플로리다,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지로 퍼졌다.

이민 동기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콜럼버스, 코르테스, 피사로 시기의 초기 이민자들은 명예와 부를 추구했으나, 이후 이민자들은 보다 현실적인 목적을 가졌다. 대부분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악화된 경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이주했다. 많은 이들은 신대륙에 정착한 친척들로부터 풍요로운 삶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주를 결심했다. 실제로 가족 관계는 이민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1600년까지 신대륙 출생 스페인계 인구는 새로 이주한 유럽 출생자 수를 넘어섰다. 15701620년 사이, 스페인계 인구는 약 12만 5천15만 명에서 약 40만 명으로 세 배가량 증가했으며, 이 중 절반은 자연 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세대가 거듭되면서, 식민지 출생자(크리오요)의 비율은 점점 더 높아졌고, 1625년 이후 스페인 본토에서의 이민이 감소하면서, 백인 인구 중에서 본토 출신(페닌술라르)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었다.

스페인과 크리오요 인구는 식민지 전체에 고르게 퍼진 것이 아니라 주로 멕시코와 페루에 집중되어 있었다. 17세기 중반에는 멕시코에 약 20만 명, 나머지 지역에 35만 명의 스페인 및 크리오요 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인구는 고정되지 않고 이동성이 컸다. 많은 스페인 이민자와 가난한 크리오요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식민지 간을 이동했다. 예를 들어, 16세기 은광이 발견되면서 멕시코와 상페루에는 앤틸리스 제도에서 수천 명의 스페인인이 이주했다. 1610년 포토시(Potosí)의 백인 인구는 스페인인 3,000명, 크리오요 3만 5천 명에 달했으나, 17세기 후반 은 생산이 줄어들면서 백인 인구는 8,000명 미만으로 감소했다.

스페인 인구는 도시 지역과 그 인근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16세기 중반 멕시코시티에는 2,000명의 시민이 있었고, 1570년에는 3,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식민지 말기에는 약 7만 명의 스페인인이 거주했다. 18세기 말까지 스페인령 아메리카 전체 스페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복 초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스페인계 인구는 1790년대에 이르러 전체 인구의 약 4분의 1에 달했다. 이 무렵에는 혼혈 인구도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아프리카계 인구 (The African Population)

정복과 정착 시기 동안 아프리카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상당한 수를 차지했다. 수천 명이 원주민과의 전투에 참여했으며, 초기 정착민 중 다수는 15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유입된 아프리카 노예들의 후손이었다. 대부분은 노예였지만, 많은 이들이 자유를 얻기도 했다.

식민지 경제의 발전은 원주민 인구가 전염병으로 급감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노동 수요는 이민자나 이베리아 반도 내의 소수 노예 인구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었고, 그 결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서 직접 노예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을 지배했기 때문에 브라질로 유입되는 노예의 규모는 스페인 식민지를 크게 상회하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설탕 산업이 발전하고, 1695년 이후 광산 붐이 일어나면서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의 아메리카 태생 후손들은 브라질 인구의 가장 큰 구성원이 되었다. 17세기 설탕 산업이 확장되던 시기, 브라질로 연 평균 약 5,600명의 노예가 수입되었으며, 1810년까지 250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인이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 규모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흑인 인구의 성장은 느렸다. 이는 노예 무역의 성 불균형과 높은 사망률 때문이었다. 구매자들은 남성을 선호했기 때문에 약 2:1의 비율로 남성이 더 많이 수입되었고, 이로 인해 가족 형성이 어려웠다. 게다가 카리브 해와 브라질의 열대 저지대는 질병 환경이 매우 치명적이어서 고사율이 높았다. 따라서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 지역에서는 자연 증가가 아닌 지속적인 노예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신생 혼혈 집단 (New Ethnic Groups)

18세기 말까지 혼혈 인구는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한 인구 집단으로, 인구 구성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스페인의 통제가 본격화되었을 당시 정착민 대부분은 유럽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남성이었다.

탐험 초기부터 유럽 남성과 인디언 여성 간의 성적 관계는 흔했다. 역사학자 R. C. 패든(Padden)에 따르면, 스페인 정복자들은 “전장에서 사상자를 내는 것보다 임신을 남기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관계는 대부분 비공식적이고 단기적이었으며, 강간이나 다른 형태의 강제도 흔했다. 그러나 신세계에서 유럽 남성의 지위와 군사적 성공은 일부 원주민 가문이 자발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수많은 원주민 여성과 관계를 맺었고, 혼혈 자녀(메스티소)를 낳았다. 말린체(Malinche)로 잘 알려진 도냐 마리나(Dona Marina)는 여러 명의 스페인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 유럽 남성이 인디언 여성과 정식으로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혼혈 자녀는 당시 기준으로 ‘자연 자녀’ 혹은 ‘서자’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혼외 출생이었고, 양부모가 결혼할 수 없는 경우(근친이거나 이미 결혼한 경우)에는 그 신분이 개선될 수 없었다.

혼외 출생은 극복하기 어려운 낙인이었으나, 유럽인 아버지의 지위와 태도는 자녀의 사회적 기회를 좌우했다. 아버지가 자녀와 관계를 유지하거나 인정할 경우, 그 자녀는 종종 유럽 사회에 받아들여져 아버지의 지위를 일부 공유했다. 반면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인디언 어머니는 자녀를 토착 문화 속에서 양육했다.

초기 혼혈 인구의 사회적 지위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일부는 차별을 겪었지만, 다른 이들은 책임 있는 지위나 지도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혼혈 인구가 증가하고, 유럽계 여성의 수가 늘어나면서 메스티소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하락하였고, 일반적으로 ‘불법적인 출생’과 연관되게 되었다.

포르투갈령 아메리카에서는 이 혼혈 인구를 마멜루쿠(mameluco), 메스티수(mestico), 혹은 **카보클루(caboclo)**라고 불렀다. 16세기 말~17세기에는 이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으며, 국경 지대에서 포르투갈 권위를 강화하고 프랑스 및 후에는 네덜란드의 군사 개입으로부터 브라질을 방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인의 도착은 아메리카에 제3의 인종 집단을 추가했다. 아프리카 노예와 그 자녀들(노예이거나 자유인이거나 모두 포함)은 신세계 정체성의 복잡성에 기여했다. 스페인 또는 포르투갈 식민지 주민들이 흑인 여성과 결혼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나, 특히 플랜테이션 지역에서는 비공식적인 관계가 흔했다.

노예 여성과 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물라토(mulato) 혹은 **파르도(pardo)**라 불렸으며, 어머니가 노예일 경우 자녀도 법적으로 노예 신분을 이어받았다(‘모계 노예 법칙’). 흑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도 존재했으며, 보통은 흑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로, 일부 지역에서는 삼보(zambo), 다른 지역에서는 물라토라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민족 간 결합은 인디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닌 비백인 인구의 급증을 가져왔다. 1800년경 스페인 제국의 총 인구 1,410만 명 중 약 45%가 비인디언이었으며, 그중 20% 이상이 메스티소 또는 파르도였다. **카스타(casta)**라는 용어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비백인이면서 인디언도 아닌 모든 혼혈 인구를 지칭하는 포괄적 용어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은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 구성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전체적으로 원주민 인구는 최대 90%까지 감소했다. 특히 고지대와 같은 온화한 기후 지역에서는 16세기 이후 일정한 회복세가 있었지만, 1800년이 되어도 정복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지역은 없었다. 반면 유럽인의 수는 자연 출산과 이민을 통해 증가했다. 카리브 제도와 태평양 연안 저지대에서는 아프리카 노예가 질병으로 인구가 격감한 원주민을 대신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인과 아프리카인, 원주민이 서로 혼합되면서 새로운 민족과 문화가 형성되었다. 혼혈 인구는 16세기 후반부터 빠르게 증가하였으며, 식민지 시대가 진행될수록 라틴아메리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차 확대되었다.

 

인디언 노동 (Indian Labor)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의 국내 경제와 수출 경제는 대부분 강제노동에 의존했다. 시간이 지나며 아프리카 노예와 혼혈 인구의 노동이 보완적으로 활용되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인디언 노동력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이 보유한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광업과 농업을 통해 수출을 가능케 했고, 또한 국내 시장을 위한 농업, 목축, 직물 생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라질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16세기 중반까지 인디언 노예 노동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발전한 후부터 점차 인디언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다. 17세기 초가 되면 페르남부쿠와 바이아의 설탕 플랜테이션은 거의 대부분 아프리카 노예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인디언들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식민 당국은 다양한 형태의 강제 노동과 재정적 요구를 통해 그들을 동원했다. 인구 감소, 노동과 공물(tribute)의 분리, 물품을 현금 공물로 전환, 스페인 관리들로부터의 강제 구매 등의 방식은 노동 조직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인디언들은 점차 화폐화된 식민지 경제에 통합되었으며, 이는 기존의 토착 경제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지만 그 위에 겹겹이 얹혀졌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사용된 주요 노동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 엔코미엔다(encomienda)
  • 레파르티미엔토(repartimiento) 또는 미타(mita)
  • 자유 임금노동(free wage labor)
  • 야나코나헤(yanaconaje)
  • 노예제(slave labor)

브라질에서는 식민지 초기 농업 노동의 대부분을 인디언 노예가 담당했으나, 1570년대 이후 아프리카 노예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엔코미엔다 (Encomienda)

스페인 국왕과 개별 스페인 정복자들은 신세계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원했다. 잉카 제국에서 약탈된 금은 보물이 예외적으로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약탈만으로는 큰 부를 얻기 어려웠다. 그러나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에는 정복 이전부터 도시화된 경제 선진 사회가 있었고, 이들은 토착 지배자에게 농산물과 노동을 조공(tribute)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과 정복자들에게는 이 노동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카리브 제도에서는 스페인인들이 초기 형태의 엔코미엔다와 노예제를 활용하여 인디언 노동을 확보했다. 에스파뇰라 섬에서 엔코미엔다로 배속된 인디언들은 금광으로 강제 이송되었으며, 과도한 노동, 식량 요구,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를 당했고, 심지어는 매매되기도 했다. 이들은 사실상 노예와 다름없는 처지였다.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는 이러한 과도한 착취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받아들여 **1512년 부르고스 법(Laws of Burgos)**을 제정했다. 이는 인디언 노동에 대한 첫 공식 규제 시도였으며, 더 나은 노동 조건, 충분한 식량과 주거, 처벌 제한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멕시코에 도달했을 무렵, 인디언 배분을 통해 노동을 확보하는 엔코미엔다 방식은 이미 그들에게 당연하고 필수적인 보상 수단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코르테스는 카리브 제도의 인구 붕괴를 목격한 경험으로 인해 그 영향을 염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인디언 카시케(족장)들과 그 주민들을 할당해주었다. 이후 정복이 이루어진 각 지역에서도 엔코미엔다는 가장 귀중한 전리품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정복자와 초기 정착자 중 엔코미엔다를 부여받은 자들은 수십 년간 식민지 귀족 계급을 형성했다. 이들은 대규모 가구를 구성했고, 농촌 지역에서도 인디언 공동체를 시장 경제에 편입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엔코미엔다의 크기와 가치는 매우 다양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 국왕은 코르테스에게 11만 5천 명의 인디언을 엔코미엔다로 인정했는데, 이는 실제 그가 통제한 수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 피사로는 페루 정복의 대가로 2만 명의 조공 인디언을 자신에게 배정했다. 1535년 멕시코 계곡의 30개 엔코미엔다는 평균 6,000명씩의 인디언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법적 상한선인 300명을 훨씬 초과하는 숫자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단일 카시케와 그의 공동체를 배정받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멕시코 중부와 페루 같은 중심지에서도 엔코미엔다 보유자는 많지 않았다. 1521년부터 1555년까지 신스페인에서 확인된 엔코미엔다 수혜자는 506명뿐이며, 이 중 상당수는 중도에 국왕에게 반환되었다. 페루에서도 전체 스페인 인구 약 8,000명 중 단 5%만이 인디언을 엔코미엔다로 보유했다.

식민지 초기에는 엔코미엔다 제도가 일정 부분 토착 사회의 경제와 문화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귀금속이 없는 지역에서는 엔코멘데로들의 요구가 정복 이전 토착 엘리트의 요구와 유사했다. 멕시코와 페루의 안정된 농업경제 구조는 카리브 제도에서의 강제이동과 채굴 중심의 파괴적인 노동과는 다른 형태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초기 엔코멘데로들은 카리브의 교훈을 거의 배우지 못했다. 이들은 인디언을 혹사시켰고, 건축과 농장·광산에서의 강제노동은 물론, 인디언의 재산과 여성까지 강탈했으며, 반항하면 구타·감금·살해했다. 일부는 인디언 노동력을 타인에게 팔기도 했고, 일부는 인디언을 내쫓고 토지를 차지하여 현금작물과 가축을 도입했다. 여기에 원주민 카시케나 귀족들도 추가로 세금을 요구하여 일반 민중의 부담은 더욱 심해졌다.

엔코멘데로들은 수익 확보에 집중하며, 판매 가능한 공물을 요구했다. 공물은 지역 자원에 따라 다양했으며, 현금뿐 아니라 식량, 원재료, 완제품으로도 납부되었다. 예를 들어 1540년대 한 멕시코 엔코미엔다는 매일 닭 2마리, 말 먹이, 장작, 옥수수를 제공했고, 80일마다 셔츠, 속치마, 담요 등을 공급했다. 지역에 따라 면직물, 카카오, 코치닐, 리마, 밀, 코카 등이 주요 공물이었다.

판매 가능한 공물 외에도, 대부분의 엔코멘데로는 자택, 농장, 작업장에서의 노동을 요구했다. 때로는 원주민의 노동을 통해 수출 산업에 진입하기도 했으며, 중미의 엔코멘데로들은 카카오를 공물로 받아 대형 멕시코 시장에 도매상으로 납품했고, 투쿠만과 코르도바에서는 은광 도시 포토시 시장을 겨냥해 인디언 남녀노소를 조직해 직물을 생산하게 했다.

 

신법 (The New Laws)

16세기 중반, 원주민 인구의 격감, 스페인 이민자의 증가, 그리고 엔코멘데로들의 학대에 대한 비판이 맞물리면서 큰 논쟁이 촉발되었다. 국왕은 신세계에서 엔코멘데로들이 새로운 카스티야 귀족 계층처럼 군림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었고, 엔코미엔다를 받지 못한 정착민들과 원주민 착취를 규탄하는 성직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도미니코 수도사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였다. 그의 노력으로 **1542년 신법(New Laws)**이 제정되었다.

신법은 보다 효과적인 행정 체계를 만들기 위해 페루에 부왕직을 설치하고, 리마와 과테말라에 아우디엔시아(왕립 법원)를 설립하는 등 사법 체계 개혁을 포함했다. 그러나 이 법은 주로 다음 조치들로 기억된다:

  • 인디언 노예제 금지
  • 엔코멘데로들의 권한 약화
  • 페루 내 내전에 관여한 인물들의 엔코미엔다 박탈 명령
  • 새로운 엔코미엔다 배분 금지
  • 기존 엔코미엔다는 소유자의 사망 시 왕실로 귀속될 것

이러한 조치는 엔코멘데로들과 그 지지자들을 격분시켰고, 페루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초대 부왕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신스페인에서는 보다 신중했던 부왕 안토니오 데 멘도사(Antonio de Mendoza)가 반란을 피하기 위해 법 집행을 유예했다.

왕실은 결국 강경 조치를 완화하여 엔코미엔다를 한 세대 더 이어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고, 후계자에게 상속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잦은 내전과 후계자 부족으로 인해 많은 엔코미엔다가 이미 왕실로 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예 조치의 실질적 영향은 크지 않았다. 엔코미엔다의 조세 수입은 **코레히도르(corregidor, 지방 행정관)**들이 관리하였고, 이들은 평생직이 아닌 단기 임명직이었다.

1570년경까지는 멕시코 계곡에서 전체 엔코미엔다 수입의 약 4분의 3이 국왕에게 귀속되었으며, 3세대, 4세대 상속의 의미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파라과이, 유카탄, 중앙아메리카 외곽, 누에바 그라나다,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등지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도 엔코미엔다와 기타 공물 및 노동 형태가 존속했다. 이 제도들이 해당 지역의 경제에 핵심적이긴 했으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왕실은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레파르티미엔토 / 미타 (Repartimiento / Mita)

엔코미엔다의 직접적인 통제가 식민지 당국의 손에 들어가면서, 인디언 공동체는 기존의 현물 공물 대신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전환은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연간 최대 8페소에 이르는 현금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인디언들은 시장용 물품을 생산하거나 임금 노동을 해야 했다. 신스페인과 페루의 주요 도시 및 광산 근처에서는 임금 노동과 상업적 농업이 인디언 생활의 필수 요소가 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화폐 경제에 덜 통합되었다. 하지만 1600년경까지 대부분의 인디언 공동체는 식민 국가와 교회, 그리고 유럽 물질문화의 확산에 따른 새로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재편해야 했다.

그러나 현금 공물과 생필품 구매를 위한 임금 노동만으로는 스페인 대지주, 광산업자, 직물 생산자들이 요구하는 값싼 대규모 노동력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더욱이 초기 전염병을 견디고 살아남은 인디언 인구는 종종 주요 경제 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살았고, 특히 멕시코와 페루의 광산 지역에서는 인구밀도가 낮았다. 이에 따라 스페인 당국은 대규모 인디언 노동자를 일정 기간 강제로 동원하는 순환식 노동 징발 제도, 즉 레파르티미엔토(신스페인) 또는 미타(페루)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강제 노동 제도는 아즈텍과 잉카 제국에서도 존재했기 때문에, 스페인 식민 당국은 이를 정당화하고 쉽게 도입할 수 있었다. 식민지 초부터 도로, 수로, 요새, 교회, 공공건물 건설 등에서 인디언들의 강제노동이 이뤄졌으며, 일부 농업 작업에도 사용되었다. 공식적인 레파르티미엔토와 미타 제도는 다음과 같이 확립되었다:

  • 신스페인: 1550년대
  • 안데스 중앙 지역: 1570년대
  • 콜롬비아 동부 고지대: 1590년대

이 제도 하에서, 각 인디언 공동체는 정해진 인원을 매년 2~4개월 동안 순환적으로 제공해야 했다. 이들은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일했으며, 이 임금으로 공물과 종교세 등을 납부해야 했다.

이 강제노동 시스템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 신스페인: 주로 농업 노동에 집중되었고, 일부 은광에서도 활용되었다.
  • 페루의 미타: 초기 광산 산업, 해안 플랜테이션, 도로 정비 등에서 핵심적인 노동력이었다.
  • 키토와 투쿠만: 방직공장(오브라헤, obraje)에서의 노동이 일반적이었다.
  • 중앙아메리카: 밀 재배와 인디고 생산에 동원되었는데, 인디고의 경우 불법이었지만 당국과 생산자들은 벌금을 노동 비용 일부로 간주했다.
  • 오아하카(Oaxaca): 레파르티미엔토로 동원된 인디언은 전체 공물 납부자의 약 4%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강제 노동 형태는 안데스 남부 원주민에게 부과된 포토시 광산 미타였다. 1540년대 은광 발견과 함께 시작된 포토시 광산은 초기부터 인디언 강제노동에 의존했다. 그러나 광산주들 간 경쟁과 원주민들의 저항으로 기존 시스템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에 1572년 부왕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는 매년 약 13,000명의 인디언을 포토시에 동원하는 정규 미타 체계를 구축했다.

16~17세기 동안, 미타 대상 인디언들은 일정 금액을 지불하여 강제노동에서 면제받기도 했으며, 이 현금은 점차 광산주들의 수익원이 되었다. 즉, 공동체 내의 상호부조에 기반한 전통적인 노동 시스템이 결국 빈곤한 인디언으로부터 부유한 스페인인에게로의 부의 강제 이전 형태로 변질된 것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도 레파르티미엔토/미타 제도가 지속되었다.

  • 페루 광산 미타
  • 에콰도르 직물 공장의 레파르티미엔토
  • 중앙아메리카 농업 부문의 레파르티미엔토 등은 19세기까지 유지되었다.
  • 신스페인 중심부에서는 17세기 초까지는 농업 부문에서 중요했지만, 북부 누에바 갈리시아에서는 18세기 초까지 자유노동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자유 임금 노동 (Free Wage Labor)

원주민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와 스페인계 인구의 증가로 인해, 레파르티미엔토는 농업 및 광산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해졌다. 신스페인 중부의 대지주(아시엔다 소유자)들과 광산업자들은 인디언과 혼혈인들(castas)과 직접 계약을 맺어 노동력을 확보했다. 이들에게는 레파르티미엔토 노동자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자유 임금 노동은 처음에는 레파르티미엔토를 보완하는 역할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점차 대체하게 되었다. 토지를 판매하거나 빼앗겨 땅을 잃은 인디언들, 혹은 공동체의 과도한 재정 부담을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임금 노동 시장에 유입되었고, 일부는 아예 아시엔다(대농장)에 정착하여 상시 노동자가 되었다.

1630년까지 신스페인에서는 자유 임금 노동이 레파르티미엔토를 대부분 대체했으며, 아시엔다 거주 노동자들, 특히 혼혈인의 수가 증가했다. 멕시코 계곡에서는 레파르티미엔토가 호수 텍스코코 배수 공사와 같은 거대한 공공사업을 제외하면 거의 사라졌고, 16세기 말 페루와 상페루(볼리비아)에서도 광산 지역에서는 미타보다 자유 임금 노동이 더 일반적이 되었다. 칠레에서는 17세기 중반부터,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동고지대에서는 18세기부터 자유 임금 노동이 널리 퍼졌다.

스페인령 아메리카 전역에서 대지주와 광산 소유자는 노동비를 통제하여 임금을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쟁이 제한된 왜곡된 노동 시장 안에 있었다.


부채 예속 (Debt Peonage)

자유 임금 노동에서 파생된 형태 중 하나가 바로 **부채 예속(debt peonage)**이다. 아시엔다주, 광산주, 직물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다른 고용주에게 이동하지 못하도록 빚을 지게 만들어 묶어두려 했다. 노동자들 역시 고용 전에 선불이나 신용을 요구하는 일이 흔했으며,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 이 빚이 영원히 청산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부채 예속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했다.

  • 신스페인 전역에서 흔히 사용되었으며,
  • 노동자가 진 평균 부채는 3주에서 11개월치 임금에 해당되었다.
  • 예를 들어, 모렐로스(Morelos) 지역에서는 18세기 동안 부채 예속의 규모가 거의 일정했으나,
  • 과달라하라에서는 인구 증가로 인해 노동자 협상력이 약화되면서 예속이 줄어들었다.
  • 에콰도르에서는 멕시코보다 부채 예속이 더 널리 퍼졌으며,
  • 페루 해안 지역의 농장들에서는 덜 일반적이었다.
  • 투쿠만의 예수회 소유지에서는 노동자를 붙잡아두기 위한 수단으로 정기적으로 사용되었다.
  • **칠레에서는 부채 예속이 토지 임대와 결합된 형태(인킬리나헤, inquilinaje)**로 발전했다.

 

인디언 노예제 (Indian Slavery)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노동제도는 일반적으로 엔코미엔다 → 레파르티미엔토/미타 → 자유 임금 노동 → 부채 예속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발전 경로를 따랐으며, 이는 신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여러 제도들이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공존하거나 경쟁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초기 신스페인에서는 아프리카계 노예 감독관들이 엔코미엔다 인디언들을 관리하기도 했고, 18세기 초 포토시의 은광에서는 미타 노동자, 자유 노동자, 노예가 함께 일했다.

초기 식민지 경제의 발전에 있어 인디언 노예제와 야나코나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채무노예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소유’되는 재산(chattel slavery) 형태의 인디언 노예제는 가장 억압적인 노동 형태였다.

광물 자원이나 농업 잉여 생산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스페인인들에게 엔코미엔다보다 노예제가 더 매력적인 방식이었다. 카리브 제도의 초기 정착민들은 수천 명의 인디언을 노예화했으며, 스페인 국왕도 그들의 행동에 일정 부분 동의했다. 국왕의 권위를 거부하거나 평화적으로 복속하지 않는 인디언은 합법적으로 노예화될 수 있었고, 심지어 원주민 지도자들까지도 자유로운 인디언들을 노예로 만들기도 했다.

에스파뇰라 섬에서 인구가 줄자 스페인 정착민들은 다른 섬이나 본토에서 인디언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일단 ‘노예’로 분류되면, 이들은 완전히 매매 가능한 자산이 되었다.

정복 이전의 메소아메리카에서도 스페인인들이 보기에 ‘노예제’로 보이는 강제 노동 형태가 존재했다. 전쟁포로나 범죄자(도둑, 강간범 등)는 벌로서 노예가 될 수 있었으며, 이는 스페인인들이 더 가혹한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예컨대, 중앙아메리카 정복 과정에서는 포로들이 일반 전리품처럼 나누어지고 낙인이 찍혔다. 니카라과에서는 1530년대 주요 경제활동이 인디언 노예 포획이었고, 이 노예들은 파나마와 페루로 팔려 갔다. 추정치에 따르면 15241549년 사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수만수십만 명의 인디언이 강제로 이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인구 격감1542년 신법의 시행, 라스 카사스의 영향력으로 인해 1550년경 중앙아메리카의 인디언 노예제는 종식되었다. 알론소 로페스 데 세라토(Alonso López de Cerrato)는 1548년부터 중앙아메리카(로스 콘피네스 지역)에서 신법을 집행, 노예제 철폐를 강행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정착민과 노예 상인들은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베네수엘라 연안에서는 17세기 초까지 노예 사냥이 이어졌으며, **스페인령 북부 지역(특히 신스페인 국경지대)**에서는 18세기 초까지 노예제가 존속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북부의 국경지대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도 전쟁의 일부로서 인디언을 노예화하는 일이 지속되었다.


야나코나헤 (Yanaconaje)

잉카 제국에서는 아율루(ayllu,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을 **야나코나(yanacona)**라 불렀다. 이들은 정복 이전부터 존재했던 계층이며, 스페인 정복과 미타의 도입으로 인해 이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스페인 대지주들은 야나코나가 자신의 토지에 정착하여 일정 노동과 공물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야나코나는 미타에서 면제되고 공물도 적게 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지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점점 더 특정 아시엔다에 종속된 노동자로 고착되었다. 이들을 사고파는 것은 합법은 아니었으나, 부동산 거래 시 토지와 함께 ‘포함된 존재’로 간주되었다. 한 인디언은 한 주교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제 고용주는 저의 부모가 그의 야나코나였고 제가 그의 아시엔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저를 자신의 권한 아래에 두고 노예처럼 부려왔습니다.”

은광 도시 포토시에서도 야나코나들은 끌어모아졌다. 이들의 수가 급증하자, 부왕 톨레도는 야나코나에 대한 공물 면제를 폐지하고, 그들이 현재 거주지에 정착할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야나코나헤는 사실상 자유노동과는 구별되는, 특정 장소에 묶인 종속적 노동제도로 정착되었다.

1600년경에는 페루와 상페루에서 야나코나 인구가 아율루에 속한 인구와 거의 동일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제도는 17세기까지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1790년대까지는 파라과이에서 ‘오리히나리오(originario)’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독립 이후까지 존속하였다.

 

물품 레파르티미엔토와 인디언의 저항 (Repartimiento de Bienes and Indian Resistance)

스페인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원주민의 노동을 착취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노동을 현금 수익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많은 인디언들은 제한된 경제 기회 속에서 억지로 통합된 식민 경제에 마지못해 참여했고, 세금 납부, 종교 의식 비용, 원자재 및 가공품 구매를 위해 현금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며 스페인인들은 신용 시스템을 개발하여 인디언들이 물품을 구입하거나 현금을 대출받도록 하였고, 관리들과 상인 후원자들은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 체계는 **레파르티미엔토 또는 레파르토 데 비엔네스(repartimiento or reparto de bienes/mercancías, ‘물품 분배’)**로 불리며, 17세기 후반에 정착되었고 1780년대에 법적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이 체계 하에서, **코레히도르(corregidor, 지방 행정관)**와 **알칼데 마요르(alcalde mayor, 고위 치안판사)**는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 인디언들과 외부 세계 사이의 상업을 독점했다.

  • 그들은 원자재를 신용으로 공급하고,
  • 완성품을 낮은 고정 가격에 매입했으며,
  • 여기에는 선대금에 대한 이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예:
  • 오악사카의 코치닐,
  • 상페루의 융가스 지역의 코카,
  • 키토의 직물 등

이들은 또한 노새, 직물 등 소비재도 과도한 이자율로 신용 판매했으며, 이 모든 거래는 높은 수익을 내도록 설계되었다. 게다가 코레히도르의 사법권은 강제 추심의 보장 수단이 되었고, 이 권한의 남용은 인디언들의 극심한 불만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물품 레파르티미엔토 체계는 인디언 공동체에 영구적인 무역 불균형을 초래했고, 그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인디언 남성들은 더 많은 임금노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인디언들은 이런 착취에 맞서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저항했다.

  • 가장 흔한 방법은 이주 혹은 도피였다. 이는 전통적인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 일부 인디언 지도자들은 협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거나 해임되었다.
  • 지역적 반란도 자주 일어났으며, 특히 안데스 지역에서 활발했다.

스페인 당국은 이런 반란에 무력으로 대응했으며, 구타, 투옥, 때로는 처형도 이루어졌다. 무장 투쟁으로는 큰 성과를 내기 어려웠던 인디언 공동체는 곧 식민지의 법적 수단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 예컨대, 인디언 전용 법정에서 변호사를 고용해
  • 미타 할당을 줄이거나, 법정 임금을 지불받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 이런 소송은 비용이 많이 들고 일시적인 성과에 그치는 경우도 많았지만,
  • 인디언들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법적 대응은 매우 주목할 만한 행위였다.

스페인의 노동력 요구와 상업화된 식민 경제는 인디언과 그들의 전통적 토지와의 밀접한 관계를 단절시켰다.

  • 세금, 강제 노동, 상품 구매는 인디언들을 마을 밖으로 밀어내고,
  • 결국 히스패닉 문화와 경제에 더 깊이 편입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토착 문화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으며,
    스페인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도 인디언들은 노동력과 생산의 상품화를 끝까지 저항했다.

 

노예제와 아프리카 노예무역 (Slavery and the Slave Trade)

1. 서문: 노예제의 기원

15세기 초 포르투갈의 대항해 이전, 서유럽에서의 노예제는 로마 제국 후기의 위세에 비해 크게 쇠퇴하여 사회와 경제에서 거의 사라진 주변적 제도였다. 그러나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대서양 해안을 탐색하면서 아프리카 내륙의 기존 노예무역 네트워크를 접하게 되었고, 1450년경부터 매년 수백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유럽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1480년대에는 연간 약 500명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16세기 초까지는 꾸준한 유입이 이어졌다. 따라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를 떠날 무렵, 아프리카 노예제는 이미 이베리아 반도 내에 정착된 제도였다.

노예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의 제도(예: 마데이라, 카나리아 제도)**를 개발하면서 식민지 형태로 확장되었다.

  • 동지중해 지역에서 도입된 설탕 재배 기술은
  • 마데이라와 카나리아 제도에 곧 도입되었고,
  • 노동력 부족 문제는 아프리카 노예무역과의 연결을 재촉했다.

이러한 흐름은 **사오토메(São Tomé)**의 개척으로 절정을 이루게 된다.

  • 이 섬은 아프리카 해안에서 가까웠고,
  • 중심적 설탕 플랜테이션 식민지로 발전하며
  • 무거운 자본 투자, 단일 작물 중심,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는 모델의 전형이 되었다.

2. 초기 아프리카 노예제 (Early African Slavery)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유행한 질병과 스페인·포르투갈 정착민들 사이에서 흑인 노동자에 대한 선호가 결합되면서, 아프리카 노예에 대한 수요는 급증했다. 많은 광산업자와 설탕 재배자에게 노예는 매우 수익성 높은 투자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설탕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인디언 노예보다 아프리카 노예를 더 선호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노예들이 더 건강하고, 생산성이 높고, 탈출 위험이 낮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여전히 인디언 노동력이 중심적 역할을 했고,

  • 엔코미엔다, 레파르티미엔토, 미타와 같은 체계는
  • 대규모 자본 없이도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 노동자의 부양까지 인디언 공동체가 책임지는 구조였기 때문에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아프리카 노예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지역은 인디언 인구가 급감하여 다른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곳이었다.

  • 카리브 제도,
  • 브라질 및 카리브 해 유역의 열대 저지대
    이러한 지역에서는 인디언이 전염병으로 붕괴한 자리를 아프리카 노예가 대체하며,
    담배, 카카오, 인디고, 설탕 등의 작물을 중심으로 하는 식민 경제를 떠받치게 되었다.

 

3. 설탕 재배와 초기 광산업에서의 노예 사용

설탕 재배는 16세기 초 에스파뇰라 섬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잠재력이 완전히 실현된 곳은 브라질이었다. 대서양 제도에서 발전한 플랜테이션 모델이 브라질에 도입되며, 설탕 산업은 급속히 확장되었고, 노예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도 심화되었다.

스페인 초기 식민지에서는 제노바 상인들이 자본을 제공하고, 노예는 대부분 흑인이었으며, 아즈텍과 잉카 제국 정복 이후 다수의 스페인인들이 카리브 해를 떠나 멕시코와 페루로 이동하면서, 카리브 제도의 설탕 산업은 인력과 자본을 잃고 쇠퇴하게 되었다.

초기 광산업에서도 노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1520년 이전 에스파뇰라에서는 인디언 노동을 활용한 **사금 채취(placer mining)**이 주요 채굴 방식이었다.
  • 중앙아메리카의 초기 정착민들은 금 채굴 경험이 있었으며,
  • 초기에는 엔코미엔다 및 인디언 노예 노동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원주민 노동자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지면서, 광산업자들은 값비싼 흑인 노예 수입으로 전환했다.

  • 몇몇 금광 지역에서 수익이 증가하자, 흑인 노예 수입이 확대되었고,
  • 1540년대에는 중앙아메리카에만 약 3,000명의 노예가 유입되었다.
  • 그러나 이후 금 생산이 감소하자, 이들은 다시 페루 등 부유한 지역으로 재판매되었고,
  • 중앙아메리카는 저렴한 인디언 노동으로 회귀했다.

페루의 포토시 은광에서는 1600년경 약 5,000명의 노예가 일했지만, 흑인 노예는 주로 금광 산업에 더 많이 활용되었다.

에콰도르 당국은 금광 노동을 위해 흑인 노예 수입을 반복적으로 요청했으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흑인들이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기니에서 구출하는 것이며,
거기서는 불과 폭정, 야만성 속에서 법도 없이 살고 있다.”


4.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구조와 영향

스페인은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Treaty of Alcáçovas)**을 통해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개척권을 포르투갈에 넘겼기 때문에, 자국 식민지에 아프리카 노예를 공급하기 위해 **외국 상인들과 계약(asiento)**을 체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1518년부터, 스페인 국왕은 **특정 수의 노예(piezas de Indias)**를 정해진 연도 안에 식민지에 수입할 권리를 민간 개인, 회사, 또는 독점 기업에 판매했다.

  • **‘피에사 데 인디아’**는 젊고 건강한 성인 남성 1명을 기준으로 하며,
  • 여성, 아이, 노인, 장애인은 부분 단위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 배 한 척이 100명의 피에사를 허용받고도 200명 이상을 선적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나 많은 아시엔티스타(asientista, 계약자)들은 노예 수입보다는 밀무역과 일반 상품 유입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얻었고, 정해진 노예 수를 채우지 않는 일이 많았다.
또한 스페인 식민지의 **함대 시스템(fleet system)**은 유럽 시장에 식민지 플랜테이션 상품을 수출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1500년대 초부터 1810년까지 약 100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스페인령 아메리카로 이송되었다.

  • 특히 18세기 말설탕, 열대 작물의 생산 급증과 함께 노예 수입이 정점에 달했다.
  • 이 시기 쿠바의 설탕 플랜테이션이 전체 스페인 식민지 노예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 베네수엘라와 라플라타 지역도 수입량을 늘렸다.

하지만 **전체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스페인 식민지가 차지한 비율은 약 13%**에 불과했으며,

  • 브라질과 프랑스·영국의 카리브 식민지가 가장 많은 수를 수입했다.
  • **북미 영국 식민지(미국)**는 약 35만 명,
    즉 스페인 아메리카의 1/3 수준을 수입했다.

5. 노예무역의 아프리카 지역 영향

미주로 운송된 노예의 절대다수는 서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

  •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상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의 작은 섬이나 요새에서 무역 거점을 운영하며,
  • 제조품, 럼주, 담배 등을 교환하여 아프리카 중개상들에게서 노예를 구매했다.

유럽 상인들은 청년 남성을 가장 선호했으며,

  • 여성, 아동, 노인수송비는 같지만 가격은 낮아 이윤이 적었기 때문이다.
  • 한편, 아프리카 사회 내부에서는 여성이 농업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사하라 무역에서는 여성 노예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여성 노예 판매가 더 꺼려졌다.

이러한 결과로 **미주 노예 인구는 심각한 성비 불균형(남성:여성 = 2:1)**을 보였으며, 가족 형성, 자연 증가율, 사회 안정성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 또한, 식민지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특정 아프리카 지역의 노예를 선호하기도 했다.

  • 어떤 문화권 출신은 근면하거나 온순하다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현지 사정은 조달의 불규칙성과 가격 변동성으로 인해 이러한 수요를 정확히 반영할 수 없었고, 노예는 단순히 수급이 가능한 곳에서 대량 확보되었다.

6. 브라질의 플랜테이션 노예제 (Plantation Slavery in Brazil)

브라질은 미주 대륙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을 도입한 식민지였다.

  • 초기에는 인디언을 사용했지만, 전염병과 전투로 인디언 인구가 급감하면서
  • 아프리카 노예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 1620년대까지 북동부 설탕지대는 대부분 아프리카 노예에 의존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무역망에 대한 직접 통제를 바탕으로

  • 브라질에 노예를 안정적으로 공급했고,
  • 운송 거리도 짧아 운송 중 사망률도 낮았다.

그 결과,

  • 17세기 동안 브라질에 유입된 노예 수는
    스페인 식민지 + 프랑스·영국 카리브 식민지 전체에 맞먹을 정도였으며,
  • 18세기까지도 브라질은 대서양 노예무역의 최대 수입처였다.
  • 1810년까지 25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노예가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런 수치는 아프리카에서의 희생을 감추고 있다.

  • 수만 명이 노예 항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전쟁, 납치, 기근 등으로 사망했고,
  • 대서양 횡단 도중 감금된 환경에서 100만~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예: 1717년 아프리카에서 출항한 *조지 호(George)*호의 594명 중 단 98명만이 생존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착.

학계에서는 노예무역의 수익률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 일부는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 원천이라고 주장하고,
  • 일부는 총수익은 높지 않고 개별 투자자 손실도 잦았다고 본다.
  • 일반적으로 **평균 수익률은 5~6%**로 추정되며,
  • 브라질 무역은 규제가 적어 더 안정적 수익을 냈다고 평가된다.

7. 도시 노예제 (Urban Slavery)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는 노예제가 플랜테이션보다는 도시에서 더 일반적이었다.

  • 농장 기반의 설탕 산업이 늦게 성장했기 때문에,
  • 아프리카 노예들은 도시에서 일하며 일생을 보낸 경우가 많았다.
  • 이들은 수공업자, 가정부, 짐꾼, 거리 상인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다.

18세기 중반경,

  • 카라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리마, 키토, 보고타 등의 도시에서 노예는 **총인구의 10~25%**를 차지했다.
  • 자유 흑인과 혼혈 인구까지 포함하면, 일부 도시는 50% 이상이 흑인계였다.
  • 브라질 도시에서도 이와 유사한 양상이 있었으며, 1775년 사우바도르에서는 백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다.

도시에서는 소규모 노예 보유가 일반적이었다.

  • 일부 부유층 가정에서는 15명 이상을 보유했지만,
  • 대부분의 집에서는 1~2명 정도였다.
  • 좁은 공간에서 함께 거주하며 노예와 주인의 친밀도가 높았고,
  • 도시 노예는 영양 상태와 건강도 더 나았으며, 수명도 길었다.

이러한 환경은 혼인율, 출산율의 증가로 이어졌고,

  • 법적 결혼이 가능하고,
  • **노예 해방(마눔미시온, manumission)**도 비교적 쉬웠다.
  • 스페인 및 포르투갈 법은 노예가 자유를 구입할 권리를 인정했고, 가격이 합의되지 않으면 판사가 책정하도록 허용했다.

8. 노예의 해방과 저항 (Resistance and Manumission)

도시 노예들은 법원에 폭행, 결혼파기, 가족 분리 등의 문제로 항의할 수 있었고,

  • 종종 자유를 구매하거나
  • 잔인한 주인으로부터 강제 이주 명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법원은 미국 남부와 달리
    흑인을 '자유인'으로 추정하고, 소유 증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저항 방식은 탈출이었다.

  • 많은 노예들은 도망쳐 다른 노동을 찾거나,
  • 친척, 자유 흑인의 도움을 받아 도시로 잠입했다.
  • 도시 내 흑인 공동체와의 연대는 도망 노예에게 중요한 피신처가 되었다.

더 조직적인 형태의 저항으로는 **자유 공동체(브라질: 킬롬보, Quilombo / 스페인령: 팔렌케, Palenque)**가 있었다.

  • 1670년대, 브라질 알라고아스의 팔마레스에는 2만 명에 달하는 도망 노예가 거주했고,
  • 1697년까지 수십 년간 스페인군의 공격에 저항했다.
  • 일부 지역에서는 스페인 당국이 이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 대신 새로운 도망 노예를 잡아오게 하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