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gan Trading Roles ch.4 The world of credit in the city of silver 번역
chapter 4.
은의 도시에서의 신용의 세계
“산토 도밍고 교구에 사는 인디아 콜라(india colla) 우르코모라는 여성이, 1572년 유언장에서 ‘내가 그녀에게 팔았던 코카잎과 빵값으로 3페소와 2레알을 나에게 빚지고 있다’고 카탈리나 팔라가 진술했다.”
이 원주민 여성(쿠스코 출신)은 아과요, 토크타, 키카나, 디에고라는 다른 원주민 여성과 남성에게 2.5페소에서 12페소에 달하는 채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모두 빵과 코카잎을 판 값이었다.
펄페로(pulpero, 잡화상) 후안 바우티스타 히노벨도 1560년대 후반과 1570년대 초반 포토시에서 활동하던 도시 상인이었고, 이처럼 작은 채무를 청구했다. 가르시아 에르난데스를 포함한 수많은 스페인 남성들도 와인과 옷 같은 물품을 위해 몇 페소씩 빚을 졌다.
히노벨은 또 “내 하인 테레사가 일하는 마르틴이라는 원주민 남성이 내 가게에서 가져간 물건값으로 5페소를 나에게 빚지고 있다”고도 밝혔다.
팔라와 히노벨은 포토시 내에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장사를 했으며, 각각의 장소는 고유한 상품과 고객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팔라는 자신의 지리적 정체성(콜라 지역)과 거주지를 언급하며 채무자를 특정했고, 히노벨은 하인 테레사의 도움을 받아 이를 수행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포토시에서 도시 상인들이 고객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이미 1570년대 초부터 포토시 주민들은 일상 용품 구매를 위해 외상을 자주 사용했다. 외상은 새롭게 떠오르는 시장경제의 도시적 압력에 대한 중요한 대응 방식이었다.
팔라와 히노벨의 사례처럼, 상점 주인, 노점상, 선술집 주인은 이러한 신용 관행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신용을 구할 수 있는 장소는 매우 많았다. 시장 상인들은 ‘인디오 시장(Gato de las Indias)’이나 도시 곳곳의 작은 광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공식·비공식 상점을 합치면 100곳이 넘었고, 선술집은 도시 중심부에만 35곳 이상이 운영되어 잡화점을 능가했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장소에서의 신용 거래는 인디언, 스페인, 아프리카계 남성과 여성 모두가 참여했으며, 이들의 활동은 종교기관이 전통적으로 담당하던 대출 기능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알기 쉽게 설명]
이 글은 16세기 후반 볼리비아 포토시(Potosí)의 일상 경제생활에서 ‘외상 거래(신용)’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포토시는 은광 개발로 인해 급격히 성장한 도시였고,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어우러져 살았습니다.
- 주인공들은 누구인가요?
원주민 여성인 카탈리나 팔라와 잡화상인 후안 히노벨이라는 두 상인이 소개됩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돈을 빌리거나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의 명단을 남깁니다. - 어떤 방식으로 장사를 했나요?
이들은 고객들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팔았고, 고객은 나중에 갚는 식으로 거래했습니다. 빵, 코카잎, 와인, 옷 등 일상적인 소비재가 주요 품목이었습니다. - 신용 거래는 누구나 했나요?
네. 신용 거래는 남녀노소, 인디언, 스페인인, 아프리카인 모두가 참여하는 일상적인 경제 활동이었고, 장터, 가게, 선술집 등 다양한 장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이게 왜 중요할까요?
당시 경제 시스템은 단순히 교회나 귀족이 돈을 빌려주는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실질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해 운영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원주민 여성들이 경제적 행위자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시각을 넓혀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비엘리트 계층, 특히 비스페인계 인물들이 신용 거래망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2장과 3장에서 우리는 시의회의 우선순위가 상점 위치와 판매 상품 통제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았다. 관리들은 원주민 거주 지역에서의 풀페리아(잡화점)를 금지하려 시도했고, 빵과 술을 파는 적절한 장소, 영업시간, 가격에 대한 규칙을 설정했다.
이러한 상품들이 시장이나 상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결제되는가도 관심사였다. 외상거래는 수은이나 은화, 피냐(은괴 단위)로의 환전과 관련해 불안을 야기했다. 시의회는 또한 상점주들이 도둑맞은 물건을 받는다고 의심했다.
이 불안은 원주민들이 술을 구매하는 데까지 확대되었고, 그 상황에 선술집이 포함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원주민의 지출에 대한 불만은 스페인인 관찰자들의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더 큰 우려는, 원주민들이 훔친 물건으로 술을 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스페인인들이 원주민 보호자(guardian)로서 도덕적·종교적 교육을 실패했다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공식적인 불만 제기와 규제에도 불구하고, 신용거래는 시의원들의 좁은 시야 안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도시 경제에서 음식과 술 분야는 외상과 전당대출(물건 담보로 돈을 빌리는 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도시 신용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거래는 식민 신용 질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즉, 중심에 수도원이나 교회가 아닌 도시의 소상점들이 있었다. 이러한 작은 상업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외상거래와 대출은 식민지 종교기관과 병행되는 세속적 신용체계를 형성했다.
스페인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은 신용을 필요로 했지만,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사회적 지위에 달려 있었다.
종교기관들(종교재판소, 남녀 수도회 등)은 신용 제공자로서의 역할이 잘 알려져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카하 데 센소스 데 인디오스(caja de censos de indios)’라는 긴급기금이 존재했는데, 이는 원주민들이 공동 기부한 돈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행정관들은 이 자금을 원주민 공동체 외부 사람들에게 대출하면서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엘리트 계층의 신용자금원이 되었다. 도심에서는 원주민 공동체가 자체 신용기관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교회 네트워크를 통하지 않았다.
공증인을 고용할 수 있는 이들은 계약서(carta de obligación)나 약속어음(promissory note)을 통해 공식적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신용 옵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신용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엘리트적 지위이다.
비엘리트, 원주민, 여성은 신용 접근에 제한을 받았다. 그렇기에 전통적 신용 체계에서 배제된 이들이 상업 부문에서 자체적인 방식으로 신용 구조를 만들어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알기 쉽게 해설]
-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이 페이지는 포토시의 도시 경제에서 ‘외상’과 ‘신용’이 단순한 개인 거래를 넘어서 정치, 종교, 계급과 얽힌 복잡한 문제였음을 보여줍니다. - 누가 문제였나요?
특히 원주민이나 여성, 하층민들이 이 신용 거래에 참여하는 것이 당시의 정치·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문제로 보였습니다. 외상거래가 통제되지 않으면, 도둑질·도덕적 타락 같은 부작용이 생긴다고 여긴 것이죠. - 왜 그렇게 우려했나요?
당시 스페인 제국은 원주민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할 존재'로 봤습니다. 그런데 원주민이 외상으로 술을 마시거나 시장경제에 능숙하게 참여하는 모습은 이 틀을 깨뜨리는 것이었죠. - 공식 신용기관이 따로 있었나요?
네. 종교재판소, 수도회 같은 기관이 돈을 빌려주는 역할을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원주민 공동체 기금을 정부가 ‘탈취’해서 엘리트에게 대출하기도 했습니다. -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기존의 종교 기반 신용 시스템에서 소외된 사람들(원주민, 여성, 하층민)은 시장, 선술집, 잡화점 등에서 자체적인 신용 거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도시 경제의 중요한 축이 되었고, 포토시만의 독특한 신용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도시 경제의 중간 계층이나 상위 계층 참여자들이 피아도레스(fidadores)(보증인)를 통해 페소를 얻기 위해 신용을 이용하는 반면, 프렌다스(prendas)(전당 담보물)의 사용은 더 일반적이었고, 이는 하층민에게 특히 많았다. 포토시에서는 공식 금융기관이 아닌 지역의 소규모 상업 네트워크와 연결된 방식으로 신용이 형성되었다.
남성과 여성 모두 도시 내 다양한 장소에서 신용을 제공했다.
음식과 술 유통을 장악한 남성들과 달리, 여성은 푸르페리아, 치체리아, 거리 상점 운영자로서 소액 신용 거래에 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그들은 단순한 채무자가 아니라, 종종 **돈을 빌려주는 사람(moneylenders)**이자 **전당포 운영자(pawnbrokers)**로 활동했다.
이 장에서는 16세기 도시 경제 내 ‘소액 신용 거래(small credit exchanges)’의 역동적인 역할을 분석한다.
도시는 이민자들에게 매우 극심한 경제적 변화를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창의적으로 돈을 구하고 서비스 비용을 마련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러한 창의성이 다양한 도시 신용 거래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시 거래는 단순한 물물교환뿐만 아니라, 현금, 물품, 신용의 혼합 방식이었으며, **코카잎(coca)**은 거의 모든 거래에서 통화처럼 사용되었다. 심지어 공식 부동산 문서 거래에서도 코카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장과 상점은 점차적으로 사람들이 일상적인 거래를 위해 찾는 장소가 되었고, 이러한 공간들이 일종의 **‘이웃 은행(neighborhood banks)’**이 되었다.
이 장 후반부는 **대출 관행(loan practices)**과 **전당(pawn)**의 경제·사회적 기능을 분석한다.
몇 페소의 소액 대출이나 신용 확보는 적어도 16세기 후반부터는 흔한 일이 되었고, 아마도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용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평판을 갖거나 지불 담보로 삼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물건이 필요했다. 전당은 곧 대출의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전당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더 자주 활용한 방식이었고, 물물교환과 마찬가지로 상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당은 단순한 교환이 아닌, 일시적으로 물건을 맡기고 현금, 신용, 혹은 물품을 받는 행위였다. 실제로는 담보물을 잃을 위험도 있었다.
[알기 쉬운 설명]
이 부분은 포토시의 도시 서민들과 특히 여성들이 소액 신용 거래, 즉 외상, 대출, 전당 거래를 통해 어떻게 경제를 운영했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 포인트:
- 공식 은행은 없었지만, 시장과 가게, 잡화점 같은 곳이 사실상 '은행 역할'을 했어요. 여기에선 코카잎, 물건, 신용이 모두 화폐처럼 쓰였어요.
- 여성들은 단순히 외상으로 물건을 사는 소비자가 아니라, 직접 돈을 빌려주거나 물건을 담보로 잡고 운영하는 적극적인 금융 주체였어요.
- **전당 거래(pawn)**는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자신의 물건(예: 옷, 도구 등)을 맡기고 돈이나 물건을 받는 방식인데, 일시적 거래였고, 물건을 잃을 수도 있었어요.
- 신용을 받기 위해선 신뢰(평판) 혹은 가치 있는 담보가 필요했어요.
이 내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민지 원주민 여성 = 무력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그들이 당시 도시 경제에서 얼마나 주체적으로 활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SO MUCH WAS THE SILVER”
신용 관행의 부상(The Rise of Credit Practices)
16세기와 17세기 포토시에서 신용에 의존한 현실은 어느 정도 아이러니했다. 왜냐하면 포토시 은광에서 나오는 은의 양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마을에 유통되는 은은 실로 엄청났지요.” 한 관찰자는 “거의 우화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생각해보면 마치 꿈만 같았습니다”라고 감탄했다.
포토시의 경제는 정제되지 않은 은으로 넘쳐났고, 이는 다른 식민 도시들과 비교해도 특별했다. 은광에서 채굴된 은은 왕립 주조소에서 주화로 만들어졌고, 많은 형태의 은이 도시 곳곳에 쌓여 있었다. 하지만 유통 체계는 현지 엘리트나 왕실 금고에 유리하게 작동했다.
그래서 다수의 하층민들은 은이 아닌 ‘신용’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포토시 사람들은 빵 한 조각이나 치차 한 잔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해주는 상인들을 찾았다. 이러한 상인들과의 근접성 proximity to the world of trade이 **일반인들을 실질적인 ‘금융인’(ready bankers)**으로 만들었다.
도시 빈민들은 **전당(pawn)**이나 소액 대출(loans) 같은 방법을 통해 일상적 필요를 충당했다.
포토시는 새로운 경제적 수요를 야기했고,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의복이나 생필품을 포토시에서 직접 구매해야 했다. 그들은 전처럼 물물교환으로 얻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1596년 한 **미타요(mitayo, 광산 노동자)**의 식비는 한 달 평균 26페소였는데, 이는 왕령에 따라 정해진 하루 10페소 임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도시 주민들이 방을 빌리거나 주거지를 얻으려면 페소로 월세를 납부해야 했다. 포토시 전역의 상인들은 음식과 술 가격을 **페소 또는 레알(페소의 파생화폐)**로 명시했고, 이는 스페인 화폐 중심의 현금 경제로 나아가는 흐름을 가속화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 노예는 마스터를 위해 치차를 팔아 하루 3페소의 수익을 가져와야 했다고 전해진다. 노동자들은 점점 더 현금 수입을 기대받게 되었다.
[알기 쉬운 해설]
이 페이지는 포토시에 은이 넘쳐났지만, 정작 일반 서민은 은을 손에 쥘 수 없어서 신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서술합니다.
핵심 포인트 요약:
- 포토시는 은광 도시였고, 엄청난 양의 은이 존재했지만 실제로는 왕실과 엘리트에게 유리하게 배분되었음.
- 그래서 일반 주민들은 은 대신 외상(신용)과 전당 거래에 의존해야 했음.
- 생활비는 매우 높았고, 임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음. 예: 미타요는 식비만 월 26페소, 하지만 하루 임금은 10페소도 안 됨.
- 시장에서는 현금 경제가 확대되었고, 치차 판매 같은 활동이 여성·노예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 되었음.
- 상인들이 실제로 ‘은행 역할’을 했고, 사람들은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신용을 얻음.
이처럼 은이 넘쳐나는 ‘은의 도시’ 포토시에서 신용과 소액거래는 하층민들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도구였고, 여성과 원주민들도 적극적으로 이 경제에 참여했습니다.
1. 누가 돈을 빌려주었나?
- 여성, 특히 원주민 여성이 매우 적극적인 채권자로 활동했음을 보여줍니다.
- 원주민 여성은 같은 공동체 내 남성은 물론 스페인인 남성에게도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 이는 원주민 여성들이 단순한 가사노동자나 피지배자가 아니라, 도시 경제의 금융 중심에 서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2. 누가 돈을 빌렸는가?
- 스페인 남성이 가장 많은 대출을 받은 집단입니다. 특히 원주민 여성에게서도 많이 빌린 것으로 보아, 식민 권력의 위계가 반드시 경제적 관계에서 그대로 작동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 원주민 남성은 주로 같은 민족 여성이나 남성에게서 대출을 받았고, 이는 공동체 내부의 상호부조적 성격도 내포합니다.
3. 아프리카계 인물들은?
- 본문 하단에서는 아프리카계 여성 3명이 스페인 남성과 여성에게 전당 대출을 요청한 기록이 있으며, 이들은 자신의 고용주나 주인 근처에서 거래를 했다고 설명합니다.
- 이는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주로 스페인인의 사회·경제권에 의존한 구조 속에 있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핵심 메시지 정리]
- 식민도시 포토시의 신용 경제는 계층·인종·성별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구조였고, 특히 원주민 여성의 역할은 기존 역사서술에서 과소평가된 중요 요소입니다.
- 도시 여성들, 특히 원주민 여성은 단순한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자산을 소유하고, 대출을 제공하며, 도시 신용 경제의 중핵을 형성한 능동적 행위자였습니다.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신용 거래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이유는 많은 거래가 비공식적, 비기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전당거래(pawn)를 기록에 남기지 않은 설득력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스페인 고용주로부터 물건을 훔쳤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개별 사례들은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현금 및 신용 거래에 스페인인, 메스티소, 안데스 원주민과 비슷한 방식으로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메스티소(mestizos)**에 대해서는, 스페인어 사용 여부나 혼혈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그들의 활동 양상을 복잡하게 만든다.
하지만 개별 사례들은 일부 메스티소 여성들이 스페인 이웃들과 살거나, 또는 다른 이들은 ‘인디언 복장(mestiza en hábitos de india)’을 입고 원주민 구역에 살며 케추아어를 주로 사용하고 원주민 옷을 입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개인 메스티소 상점 주인들은, 도심 근처에 살면 스페인 고객과, 목장 지역(rancherías)에 살면 원주민 고객과 교류하며 상업 활동을 중개했다.
예: 마리아 구스만(María Guzmán) 같은 메스티소 상인은 스페인인과 원주민 고객 사이를 분리해서 거래했다.
이처럼 메스티소 상인들은 도심과 외곽을 넘나들며 경제 거래를 중개했고, 경계가 엄격한 민족 분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편, 여성들은 신용 거래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전당을 적극 활용했다. 전체적으로 여성의 기록이 더 많이 나타나며, 전당에 참여할 때는 특히 더 많은 여성이 관련되어 있었다.
- 원주민 여성과 스페인 여성의 활동을 합치면, 여성은 남성보다 두 배 가까이 자주 담보물 거래를 했고 (102건 vs 48건)
- **전당포 운영자(pawnbroker)**로서도 여성(83명)이 남성(67명)보다 많았다.
즉, 성별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신용 거래 네트워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신용이나 현금을 얻는 수단으로 전당을 활용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설명하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물질적 자산의 보유: 여성은 담보로 활용할 수 있는 물건(보석, 은, 의류 등)을 지니고 있었음.
- 여성은 이런 물건을 **결혼 지참금(dowry)**으로 가져왔고, 필요시 이것들을 담보로 페소를 마련했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전당을 통해 경제적 접근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았다.
[알기 쉬운 해설 요약]
1. 아프리카계 주민의 낮은 기록 등장
- 신용 거래 기록에서 드물게 보이는 이유는, 비공식적이거나 감추어진 거래가 많았기 때문.
- 도둑으로 의심받을까봐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2. 메스티소 상인의 유연한 거래 방식
- 복합적 정체성을 가진 메스티소는 도시(스페인인)와 농촌(원주민) 양쪽 모두와 거래하며 경계를 넘나듦.
- ‘인디언 복장’을 입은 메스티소 여성은 원주민 커뮤니티에 속하면서도 상업적 중개자 역할을 수행함.
3. 여성의 전당 참여는 남성보다 활발
- 여성은 돈을 빌릴 때나 빌려줄 때 모두 남성보다 활동적.
- 그 이유는 지참금으로 받은 물건을 담보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
[핵심 메시지]
포토시의 신용 경제는 단순히 남성 중심, 스페인 중심이 아니었다.
여성들, 특히 원주민과 메스티소 여성들은 경제활동의 핵심 주체였고, 담보물과 신용 네트워크의 설계자였다.
여성들은 자신이 가진 물질적 자산을 현금으로 전환하여 도시 경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여성 고객들은 남성보다 자주 전당 거래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식민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경제적 지위를 누린 여성들은, 남성보다 빈번하게 전당 거래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사회적 기대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은 식량을 구매하고 공급할 책임이 있었기에, 남성보다 더 자주 식품 구입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것이 여성이 더 자주 외상이나 신용을 활용하게 한 이유다.
모든 계층의 여성들은 전당을 이용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원주민 여성은 메스티소나 스페인 여성보다 훨씬 더 자주 전당업자(pawnbroker)로 활동했다.
원주민 여성들은 일상 구매나 대출, 도시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다른 원주민 여성들과 신용 관계를 형성했다.
반면 스페인 여성은 스페인 남성에게 신용을 얻기 위해 의존했다. 스페인 여성은 전당 거래에서 인종 간 경계를 넘는 경우가 적었고, 대신 서로 의존하거나 스페인 남성에게로 향했다.
이와 달리, 원주민 여성은 성별 간 경계를 넘어 거래를 했고, 전당과 대출 모두에서 스페인 여성과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스페인 여성보다 더 낮은 경제적 수준의 무역 네트워크(예: 더 허름한 가게, 더 작은 재고)를 활용했지만, 보다 유연하게 사회적 관계를 넘나드는 경향을 보였다.
예: 원주민 여성들은 스페인 여성에게 신용을 요청하는 일이 더 많았고, 그 반대는 드물었다(앞의 표 참고).
여성들은 이웃과 친족 관계를 넘어 경제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이 네트워크는 위아래로 뻗어 나가 사회적 위계를 넘었다.
실제로 도시 내 신용 거래는, 거래된 물품의 문화적 정체성까지 경계를 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결론부 번역]
많은 고객들이 메스티소 여성 **마리아 데 구스만(María de Guzmán)**의 가게에 들어섰을 때, 주머니엔 한 푼도 없었다.
그녀는 음식, 음료, 때로는 현금까지 제공했고, 그녀의 선반에 진열된 물품들은 그녀가 되돌려 받은 것들로 이야기되었다.
- 예): 젊은 목수 후안 데 이바라(Juan de Ybarra)는 자신의 연장을 전당 잡히고 35.5페소 상당의 와인 다섯 병을 얻었다.
- 또 다른 예): 원주민 여성 바르바라(Barbara)는 시장에서 상인으로 일했고, 원주민 옷이 들어 있는 트렁크 두 개를 전당 잡혔다.
[알기 쉬운 해설]
1. 여성과 전당 거래
-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자주 전당 거래에 참여했어요. 이유는:
- 가정을 위한 물품 구입을 여성의 책임으로 여긴 사회적 기대.
- 지참금, 의복, 보석 등 담보로 활용할 수 있는 물건을 여성들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
2. 인종 간 신용 거래의 차이
- 스페인 여성: **주로 같은 인종(스페인 남성)**에게 의존.
- 원주민 여성: 자신들끼리도 신용을 주고받고, 스페인 여성과도 거래하는 등 더 유연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
3. 결론: 전당거래의 실례
- 메스티소 여성 상인 마리아 구스만은 돈 없이 가게에 온 사람들에게 음식·현금 등을 제공했으며,
- 고객들은 자신의 도구나 소지품을 전당 잡히고 필요한 물품을 얻음.
[핵심 요약]
- 포토시의 여성들, 특히 원주민 여성, 신용 거래의 핵심 중개자였음.
- 그들은 자신의 물건을 담보로 하여 현금 또는 음식과 교환하며, 도시 경제 내에서 자율적인 금융 행위자로 기능함.
- 신용 거래는 단순한 경제 행위가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이기도 했음.
후안 데 키논네스(Juan de Quiñones)는 마리아 데 구스만의 가게에 들어와 칼라보드(옷걸이)를 전당으로 맡기고 52페소를 받아갔다. 은행원, 식료품상, 상인으로서의 구스만은 현금 대출도 해주고, 상점에 담보로 들어온 물건을 기반으로 상품을 제공했다.
그녀의 17세기 말 거래 기록은 은 생산이 감소하던 시기 포토시 도시 신용 경제가 점점 더 복잡해졌음을 보여준다.
기본 생필품을 외상으로 사는 행위는 1570년대부터 이미 일반적이었다. 상인들은 이 시기에 소액 대출도 제공했고, 코카잎과 감자, 직물, 심지어 집 같은 물건을 교환하는 물물교환과 병존했다. 담보물 전당은 16세기에는 덜 보편적이었지만, 인구 증가와 함께 17세기에는 물질적 자산이 상업 거래를 안정시키는 담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은 생산이 감소하던 시기(17세기) 전당이 늘어났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지품을 맡길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전당 거래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며, 사람들은 담보물로 인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확보했다. 즉, 물건이 ‘대출 회수의 보증’으로 기능하면서 신용 활동을 촉진시킨 것이다. 페소에 대한 수요는 도시 내 상업거래의 기준이 되었고, 전당과 대출의 성장을 이끌었다.
대출과 전당은 점차 보편화되었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접근한 것은 아니다. 스페인인은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원주민들도 못지않게 전당과 대출을 활용했다.이 차이는 결국,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더 **고가치(high value)**로 여겨졌고, 버리기(전당잡히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일부 원주민 광부들은 자유를 보장하는 문서(promesa de labor)를 담보로 삼기도 했다.
모든 계층에서 대출은 인기 있었다. 스페인 여성은 남성보다 돈을 더 자주 필요로 했고, 돈을 빌리는 데 더 적극적이었다.
신용 거래 측면에서 보면, 스페인 여성과 남성 모두 거의 동일하게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원주민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자주 신용을 제공한 사람(채권자)**이었다. 친족 네트워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주민 여성은 자신의 아이유(allu, 공동체)의 남성에게 신용을 제공했다. 스페인 여성과 달리, 포토시의 원주민 공동체는 성별에 따른 역할 분업을 했고, 여성에게 돈과 신용에 접근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했다. 많은 가족과 공동체는 여성의 경제활동을 운송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남성의 소득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이용했다.
스페인 남성 상인들 역시 잡화점 운영자로서 외상과 신용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세계에서 여성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졌다. 여성이 이 도시 경제 내 ‘소액 신용의 매매자’로서 차지한 비중은 놀라울 정도였다.
[알기 쉬운 해설]
1. 전당·대출의 진화
- 포토시의 생필품 구매는 16세기 후반부터 외상으로 이루어졌고, 17세기 들어서는 은 생산이 줄며 전당을 통한 생계유지가 중요해짐.
2. 담보물의 의미
- 사람들이 실제 물건을 담보로 맡기며 신용을 얻음.
- 예: 칼 옷걸이를 맡기고 52페소를 빌림.
3. 여성과 신용
- 스페인 여성: 돈을 자주 필요로 했고, 남성 못지않게 대출 거래에 활발히 참여.
- 원주민 여성: 더 많이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 역할. 친족, 공동체 기반으로 남성에게 신용 제공.
4. 신용의 성별 구조
- 스페인 사회는 남성 중심이지만, 원주민 사회는 여성에게도 경제 역할이 있었음.
- 특히 여성이 도시 시장에서 신용경제를 주도했다는 점은 기존 식민지 경제 서사와 다른 시각을 제시함.
핵심 요약
- 포토시 후기 식민경제에서, 물건을 담보로 한 소액 신용 거래는 도시 생존의 필수 수단이었음.
- 여성, 특히 원주민 여성은 이 경제 구조의 핵심 참여자였으며, 전당과 대출을 주도하는 채권자이자 상인으로 활동함.
- 이들의 활동은 성별·인종·사회적 위계의 경계를 넘어선 경제 주체성을 보여줌.
물품을 사고팔고, 신용을 얻고 제공하는 활동은 식민지 여성들이 도시 경제에 일상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들의 참여는 대개 소액의 돈, 전당 거래, 일상 물품과 관련되어 있었다. 다양한 요인이 여성을 전당과 전당업자로 끌어들였다.
공식 채널이 여성에게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물질적 소유물 중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전당은 생계유지를 위한 필수 물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많은 여성 전당업자들이 신용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도시 경제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컸다는 증거였다. 그녀들이 담보물과 교환해 신용을 주는 방식을 선호한 것도, 남성보다 보증 없이 대출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대출과 신용 거래는 일반적으로 소액 규모였지만,
**후안나 콜레쿠마(Juana Colquema)**가 500페소 대출을 한 사례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금융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도시 경제에서 안데스 여성들이 신용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이러한 거래를 통해 여성들은 단지 생계 보조자가 아니라, **가정 내의 금융 행위자(financial agents of the home)**가 되었다.
식민지 신용 관행은 포토시 도시 경제의 물가와 현금 수요 변화에 따라 바뀌었고,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물건을 바라보는 인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예: 일부 원주민 여성들은 **전통 직물(cumbi 천 등)**을 유산으로 딸에게 물려주었다.
유언장에는 이러한 물품을 경매에 내다 팔아 현금을 확보하거나, 아이에게 유산으로 남길 물건으로 간주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특히 직물과 은은 스페인인과 원주민 전당업자 양쪽에서 모두 담보물로 사용될 수 있었던 중요한 물품이었다.
17세기 후반, **살바도르 데 베가(Salvador de Vega)**는 스페인인과 원주민 모두를 고객으로 둔 잡화상이며 전당업자였다.
그는 릴랴스(shawls), 나나카스(머리 덮개), 아수스(드레스) 등 여성 의복을 다수 소유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스페인 여성 3명과 결혼했지만, 원주민 여성과 친척 관계는 없었음에도 이러한 전통 원주민 여성 의복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이 옷들을 전당물로 받았다는 강력한 증거다. 베가에게 이 옷들은 그의 생활용품과는 무관한 외부 물건이었다. 이 옷은 원주민 여성에게는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시장에서 가치 있는 담보 자산이었다.
[해설 및 요약]
1. 여성과 도시 경제 참여
- 여성들은 단순히 집안 살림을 꾸리는 사람을 넘어서, 신용을 제공하고 대출도 해주는 경제 주체였다.
- 특히 원주민 여성은 일상적으로 물건을 전당 잡히고, 신용을 거래하는 데 적극 참여.
2. 신용 활동의 유연성과 성평등
- 공식 금융시장은 여성에게 열려 있지 않았지만, 비공식 전당과 상점 시스템을 통해 여성들이 금융권에 진입.
- 후안나 콜레쿠마 사례는 여성이 고액 대출의 주체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줌.
3. 물건의 이중적 가치: 상징 vs 경제
- 원주민 직물이나 의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문화 정체성의 상징이자 경제 자산으로 기능.
- 전통 의복은 유산으로도, 전당물로도 가치가 있었음.
4. 살바도르 데 베가 사례
- 남성 상인도 여성의 옷을 담보물로 수집.
- 이는 도시 시장에서 전통 여성이 남긴 물건들이 현금 가치가 있었음을 보여줌.
핵심 메시지
- 여성들, 특히 원주민 여성들은 단지 가정의 보조자가 아니라, 식민 도시 경제의 핵심 금융 행위자였다.
- **전통적 문화물(의복, 직물 등)**이 도시 시장에서 경제적 자산으로 유통되었고, 여성들의 정체성과 생존 전략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다.
스페인과 원주민 문화를 시장이 어떻게 연결했는지를 보여주는 유사한 사례로는, **우르술라 포코(Ursula Poco)**가 의식용 은 음료용기(aquillas) 한 쌍을 스페인 밀가루 상인에게 9페소에 전당 잡힌 사례가 있다.이 aquillas는 먼 전고전기 시대(pre-Columbian) 유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포토시 장인들이 새로운 유럽풍 이미지로 제작한 식민지 제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quillas의 상업적 가치는 전통적 사용 방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원래 안데스 여성들은 쌍으로 된 그릇을 의례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전통적 의례는 새로운 식민지 의례로 대체되었다. 예: 여성이 자신의 의례용 컵을 팔아 9페소의 현금을 얻고, 스페인 상인에게 은 그릇을 넘기고 현금으로 대체한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는 추장을 위한 치차를 따르던 그릇이, 이젠 옥수수 맥주는 사라지고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포토시 도시 내 신용 거래의 현실은 ‘화폐의 지배’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화폐의 가치를 배웠고, 필요한 페소를 얻기 위해 전당과 대출을 활용하며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신용 거래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거나 소규모 사업에 투자하는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거래는 단순한 경제 행위가 아니라, 문화적·사회적 정보가 내재된 행위였다.
신용 거래 관행은 도시의 역사와 함께 성장하고 변화했다. 대규모 인구 성장기부터 은 광산 생산의 감소기까지, 신용 거래는 변화하는 조건에 반응했고, 물건, 은, 문화적 영향력, 여성의 경제 활동은 신용 거래를 형성한 핵심 요소였다.
도시 내 물리적·사회적 경계는 인종, 사회적 지위, 젠더를 기준으로 형성되었지만, 적절한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경계는 유동적일 수 있었다. 좋은 소개자, 유용한 담보물, 성공적인 협상 전략이 있다면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신용을 얻었다.
예:
- 베가(Vega)의 릴랴스(llicllas)
- 포코(Poco)의 아퀼라스(aquillas)
이러한 사례는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통합된 상품들이 어떻게 신용거래의 담보물로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포토시 주민들의 신용 거래는 식민 도시 경제의 문화적 성격을 반영했다.
[요약 및 해설]
1. 문화 간 연결: 시장을 통한 교류
- 우르술라 포코는 전통적 여성 의례용기를 전당 잡히고 스페인인과 거래.
- 이것은 안데스 전통이 현금 중심 경제로 변환되는 지점을 상징.
2. 신용 거래의 진화와 의미
- 신용 거래는 단순한 생계 유지 수단이 아니라, 사회·문화·경제적 정보를 내포.
- 사람들은 물건의 현금 가치뿐 아니라 상징성, 문화적 의미까지 고려하며 거래.
3. 경계 넘기: 제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 인종, 계급, 성별은 분명한 경계였지만, 실제 도시 경제에서는 유연하게 넘나들 수 있었음.
- 담보물, 추천인, 개인 간 신뢰가 경계를 넘는 열쇠 역할.
4. 결론 메시지
- 도시 경제의 신용 거래는 포토시 식민 문화 그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였으며,
- 여성과 원주민, 혼혈인 등이 이 경제 문화의 핵심 주체였다.
최종 핵심 요약: “World of Credit” 장 전체의 교훈
- 식민지 도시 포토시의 신용 경제는 단순한 금융 시스템이 아니라, 인종, 젠더, 사회적 지위가 얽힌 복합적인 문화적 공간이었다.
- 여성, 특히 원주민 여성과 메스티소 여성은 단지 피지배자가 아니라 신용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참여자였다.
- 전당과 대출은 물질적 생존 수단이자, 정체성과 문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