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지역대학원(중남미학과)/라틴아메리카 역사

현대 라틴아메리카 콜롬비아 경제성장과 사회변화

jihyunprincess 2025. 5. 16. 12:11

경제성장과 사회변화

 

콜롬비아 경제는 19세기 거의 전 기간에 거쳐 뚜렷한 저발전을 겪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장기 계획과 투자를 가로막은 정치적 불안정이었다. 콜롬비아 3대 지역인 카리브 해안, 동부, 서부 간 교역에 큰 걸림돌이었던 험준한 지형도 주요 원인이었다. 육로운송은 위험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비용이 들었다. 지리적 요인으로 인구가 분산되어 소비시장의 규모는 보잘것 없었다.

식민지시대나 그 이후에도 유일하게 안정적이고 확실한 수출품이었던 금은 20세기 초반까지 중요한 지위를 점했다.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콜롬비아는 상당향의 담배와 기나나무 껍질을 수출했다. 카리브 해안의 산타마르타 지역에서는 바나나도 중요한 상품이 되었는데, 미국에 기반을 둔 유나이티드 프루트는 이곳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선적과 수출까지 지배했다. 그러나 콜롬비아 경제개발의 토대를 세운 가장 지속적인 발전은 커피 재배와 수출이었다. 1880년대 후반 들어 커피는 콜롬비아 최대 수출품이 되었다. 커피는 1906년에 콜롬비아 수출소득의 37퍼센트를 넘게 차지했고 1920년대에는 70퍼센트 1950년대에는 80퍼센트에 달했다. 콜롬비아는 커피 수출로 세계시장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1930년대에 커피는 대체로 중소규모 재배자들이 생산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규모 농장 위주로 커피산업이 번창했다. 그러나 커피나무 재배는 집약적인 육체노동을 요하기 때문에 커피 생산에서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기 어려웠고, 소농도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다. 콜롬비아에서 소규모 커피 재배자들이 다수 살아남은 것은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의 공고화 기반이 된 중간계급 형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커피 생산은 또한 운송망 발전도 촉진했다. 고지대에서 강으로 커피를 운송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와는 달리 콜롬비아에서는 19세기 말 청도 건설이 지지부진했다. 커피 재배가 늘면서 철도도 확충되었으나 1930년대까지 2대 도시인 보고타와 메데인 사이도 철도로 직접 연결되지 못했다. 이후 정부는 철도 대신 고속도로 건설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콜롬비아의 불리한 지형 때문에 항공 운송도 전국 운송망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큰 해외시장이었던 미국은 1920년대와 1940년대에 콜롬비아 커피 수출의 90퍼센트 이상을 소비했다. 1920년대 콜롬비아의 커피 수익 급증은 고속성장과 뉴욕의 은행들이 대규모 대출을 제공할 정도로 신용도가 상승한 현상을 일컫는 '백만달러의 춤'을 야기했다. 경제호황에 대한 이러한 낙관주의와 금융거품 형성에 일조한 요인으로는 바나나와 석유 수출의 꾸준한 증가와, 파나마 배상금 2,500만 달러를 꼽을 수 있다. 늘어가던 채무는 대부분 중앙정부가 아니라 시나 지방정부가 진 것이었다. 

이때 대공황이 덮쳤다. 그런데 대공황의 사회경제적, 정치적 파장은 라틴아메리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았다. 콜롬비아의 경제회복은 브라질의 '가치 증식' 정책 즉 브라질이 1931~1940년간 커피 7,800만 자루를 폐기처분해 세계 커피 공급량을 줄인 결정에 큰 도움을 받았다. 금의 국제수요 증가, 외환관리, 콜롬비아 페소화 평가절차도 회복에 일조했다. 게다가 수출이 콜롬비아 국민총생산의 4분의 1을 밑돌았기 때문에 수출가격 하락의 충격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국제 커피가격의 변동은 소비자의 기호보다는 공급량 변화에 좌우되는 경향을 보였다. 브라질에서 주기적으로, 그러나 불규칙하게 발생한 냉해는 생산량 급감을 초래해 가격을 상승시켰고, 콜롬비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의 커피 재배자를 고무시켜 모묙을 더 많이 심게 만들었다. 이 나무들이 수확 가능하게 성장한 4~5년 뒤에는 결국 과잉생산이 발생해 커피 시세가 다시 하락했다. 더구나 커피는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경작이 가능해 경쟁에 노출되어 있었다. 콜롬비아 커피가 전 세계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번도 20퍼센트에 달한 적이 없다. 따라서 다른 국가의 커피 재배 상황의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 수출입국들은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비해 가격을 안정시키는 방편으로 1969년 국제커피협정을 체결했다.

콜롬비아 커피 생산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상대적인 퇴조기를 겪었고, 이후 대규모 생산자들이 생산성과 이윤을 향상시키면서 다시 팽창 기조로 돌아섰다. 1989년 국제커피협정이 철회되자 가격변동에 더 많이 노출되었지만, 향후 10년간은 위험을 관리할 만할 것으로 보였다. 1990년대에는 다른 개도국들의 커피 수출이 증가했다. 커피의 중요성은 콜롬비아 경제가 다변화되면서 감소했다. 커피의 상대적 쇠퇴는 바나나, 신발, 담배, 가공식품 같은 비전통 수출품의 성장으로 일부 보전되었다. 1980년대 중반의 석유 생산 급증도 수출 증대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전부터 이미 최대 수출품은 마약류, 특히 코카인이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마약 밀매는 1980~1995년 사이 콜롬비아에 360억 달러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이는 콜롬비아 국내총생산의 5.3퍼센트를 상회화는 액수이다. 마약은 콜롬비아 사회와 경제, 그리고 대미 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규제를 받지 않는 달러의 유입은 경제정책 술비에 막대한 불확실성을 야기했다. 또한 콜롬비아 페소의 화폐가치를 유지시켰다. 달러의 대규모 유입은 수입을 촉진해 국내산업을 위협했다. 게다가 석유와 마약 수익 급증은 생산 잠재력이 있는 다른 분야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저해하는 '네덜란드 병'을 초래했다는 정황도 있다.

콜롬비아 경제의 변화는 사회도 바꾸어 놓았다. 콜롬비아에서는 인구가 한 곳에 집중되는 현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콜롬비아 국민 대부분은 대도시가 아니라 고지대의 중소 규모 마을에 거주했다. 뒤이어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진행되어 한 곳에 집중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경제적 변화는 노동계급의 부상도 초래했다. 초기 노동계급은 제조업보다는 유전과 바나나 농장 같은 외국인이 지배하는 고립영토나 철도와 강 유역 개발과 같은 운송 부문에 밀집해 있었다. 20세기 접어들어 이 부문의 노동자 다수가 이념적으로 뚜렷하게 급진주의, 민족주의, 반제국주의적이었고, 때로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정당, 교회, 공산주의 좌파 중 하나가 노조를 설립하거나, 장악하거나, 끌어들였다. 좌파는 1930년대 후반 콜롬비아노동자연맹 결성을 통해 노조 운동을 상당 부분 지배하였다. 

콜롬비아의 수출 주도 전략은 결국 진정으로 번영한 사회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국제기준으로 현재 콜롬비아는 '중-하위' 소득국가이다. 빈곤과 불평등은 광범위하게 지속되었다. 1970~80년대에는 거의 60퍼센트의 국민이 빈곤선 이하의 소득을 얻었다. 더구나 1940년대 후반 인구의 1퍼센트 미만이 국민소득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러한 명백한 불평등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토지분배의 불평등은 농민의 자발적인 직접 행동을 이끌어냈다. 

 

정치와 정책: 변화의 패턴

천일전쟁과 파나마 상실이라는 재앙은 콜롬비아가 중대한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얼마 동안 정치 지배층은 공존의 의식, 즉 의회 토론이라는 신사적인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경쟁의 수단으로 내전을 일으키는 행위는 불법화되었다. 새로운 정치 행위자가 등장했고, 사회적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었다. 그리고 커피 수출에 힘입어 콜롬비아는 마침내 세계시장에 설 자리를 찾았다. 

천일전쟁의 승리에 힘입은 보수주의자들은 군부, 선거, 국가기관을 장악했다. 라파엘 레예스 장군은 1904년 대통령이 되어 철권통치를 펼쳤다. 그는 국회가 협조하지 않을 경우 해산하고 의원들을 투옥하거나 국외로 추방했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그렇지만 그는 국가재정을 개혁하고, 세계시장에서 콜롬비아의 신용도를 회복시키고, 철도와 도로 건설을 가속화하고, 커피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는 전이자인 라파엘 누녜스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레예스가 콜롬비아의 파나마 공식 승인의 대가로 미국에서 배상금 250만 달러를 받는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반대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중이 보기에 이러한 행위는 콜롬비아의 주권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대중의 분노에 직면한 레예스는 1909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비록 보수주의자들은 정권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은 10년간의 '영웅적 노동조합주의'로 이어져 1920년대 후반 절정을 이루었다. 사회주의혁명당이 이끈 한 노조가 1928년 시에나가에서 파업을 선언해 25,000명의 노동자, 특히 미국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플렌테이션 노동자들이 바나나 수확을 중단하자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 경영자는 미겔 아바디아 멘데스 대통령에게 다급한 전갈을 보내 이를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바디아 멘데스는 '공공질서' 유지를 구실 삼아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따른 충돌은 '바나나 플렌테이션 학살' 사태를 야기했다. 

1885년에서 1930년에 이르는 시기를 종종 '보수주의 헤게모니'시대라 한다. 가톨릭교회가 강력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고, 1886년 헌법에 따라 정권의 한 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교회는 전국적으로 균등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인종의 견지에서 보면 교회는 흑인과 물라토보다는 메스티소에 주력했다. 그러나 사회변화가 이 전통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에 세속화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보수당 지배는 약화되었고 집권당 내부 균열이 발생해 온건 자유주의자인 엔리케 올라야 에레라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는 15년간의 '자유주의 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이 기간 동안 중앙정부의 역할과 권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한편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정책결정 과정이 정치화되었고 이로 인해 정파 간 경쟁이 심화되었다. 올라야는 임기 중반 들어 미래지향적 농업개혁을 제안했다. 대통령 소속 대책반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프랑스 법과, 멕시코혁명과 에스파냐 공화국의 농업 원칙에 기반을 둔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 개혁안은 '모든 경작되지 않은 토지'의 국가 소유를 전제하고, 이에 따라 직접 경작하는 개인만 공공 토지를 가질 수 있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국회가 승인한 최종안은 대토지 소유주들의 지위 보존을 농민에 대한 토지 배분보다 우선하는 보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36년의 농업법은 사실상 1920년대 이래 이미 사용되던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했다. 즉 농업 개척자들이 포위한 대토지와 사안별로 공공토지 판결을 받아 낸 대토지를 정부나 민간이 분할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질 좋은 토지는 거의 재분배되지 않았다. 

올라야에 이어 취임한 로페스 푸마레호는 1934~1938년의 임기 동안 '혁명의 행진' 개시를 천명했다. 로페스는 노조 활동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노사분규의 최종 중재자를 자처했다. 그는 메데인 등의 도시에서 기업가들이 가부장적으로 노조를 통제하는 것에 정면으로 맞서 커피 수확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파업을 적극 장려했다. 1936년 로페스는 선거권을 모든 성인 남성까지 확대해 콜롬비아의 대중 기반 정치를 한걸음 앞당겼다.

자유당 내에서 온건주의자인 차기 대통령 에두아르도 산토스는 경제정책 수립에 주력했다. 그는 산업 발전 촉진을 위해 산업진흥연구원을 설립했고 더불어 메데인에 제강소, 보고타 근교에 고무공장, 바랑키야에 조선소 보이캬에 제출소 건설을 지원했다. 또한 저가주택, 그리고 상하수도를 비롯한 기반시설 건설도 지원했다. 이러한 사업들은 국가의 권위를 강화하고 그 범위를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콜롬비아는 보호주의와 자유무역을 결합한 실용적 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수출 의존적 산업은 자유무역이 이득이었지만 국제 커피시장이 퇴조해 수입대체산업화에 대한 지지가 늘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콜롬비아는 자유무역 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여러 학자가 자유무역이 정당화된 배경으로 외채위기, 이에 따른 시장의 세계화, 석유수출로 소득이 늘어서 생긴 기대, 마약 밀매 등을 지목했다. 

 

가이탄, 반발, 폭력시대

가이탄은 사회의 낙오된 계층의 지지를 얻은 개성 강한 자유주의자였다. 주로 도시에 집중되던 그의 행보는 산업 종사자들의 확연한 지지는 얻지 못했으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등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포퓰리즘 운동과 유사했다. 그는 콜롬비아의 '과두지배층'을 매섭게 공격하고 서민의 권리 증진을 옹호했다. 가이탄은 콜롬비아를 '정치의 국가'와 '국민의 국가'로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국민의 국가'는 과두지배층이 '정치의 국가'에서 배제한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국가였다. 기존 지배층이 보기에 가이탄은 벼락출세한 정치인이었고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였다. 1948년 가이탄은 보고타 도심에서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암살은 보고타시 전역에서 보고타 봉기라는 대규모 폭동을 촉발했다. 그러나 가이탄이 순교자로 숭배되자, 지배층은 정당 간 적대 관계를 심화시켜 그의 유산을 파괴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콜롬비아 정치의 전환점이었다. 가이탄의 암살은 향후 수십 년간 중도적 개혁안의 출현을 봉쇄했다. 

가이탄의 죽음으로 정치 폭력은 무섭게 늘어나 폭력시대라는 시기로 이어졌다. 폭력시대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이탄의 암살과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부채질한 증오심 가득한 정당 간 대립이었다. 1950년대 중반부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정치권력보다 경제적 이익을 노린 '마피아식' 폭력이 자행되었다. 폭력시대는 커피 벨트를 비롯해 특정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국민사회 전반에 상처를 남겼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권력 남용에 항의해 1949년 대선에 불참했다. 오스피나 대통령은 이를 구실로 국회를 폐쇄하고 여당 골수 지지자들을 고등법원에 배치하고 계엄을 선포했다. 보수당 폭도들은 경찰의 엄호를 받으며 양대 자유주의 신문의 사옥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수세에 몰린 자유주의자들을 게릴라 부대를 결성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선거에 불참한 가운데 1950년 보수당 후보 라에레아노 고메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국가 주도 산업화, 노조 통제, 선거 무력화를 통해 초보수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또한 고메스는 경제발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전력, 운송, 통신 등 국가 기반시설을 확충했다.

그러나 그는 군부와 충돌했다. 그가 1953년 군 총사령관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 장군을 경질하려 들자 로하스는 쿠데타로 맞섰다. 로하스는 첫번째 조치로 대부분 자유주의자였던 게릴라를 사면해 폭력 시대의 첫 단계를 종식시켰다. 로하스는 자신만의 지지기반인 국민행동운동과 제 3세력이라는 독자 정당도 창당했다. 이러한 행보는 자유당과 보수당을 위협했다. 그는 또 페론과 유사하게 여성의 지위 향상을 도모했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전통적 지배층은 로하스에게 등을 돌렸다. 1956년 선거에서 자유당과 보수당은 로하스를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연합했다. 교회, 총파업에 돌입한 기업가, 상인, 은행가들이 강력한 반대세력을 형성했다. 좌절한 로하스는 사임했다. 

이 사건들은 20세기 콜롬비아 정치의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군부의 개입 정도가 비교적 약했다는 것이다. 로하스 피니야 독재 정권은 분명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나 비교적 온건하고 기간이 짧았으며, 이념적으로 보수주의보다 포퓰리즘에 가까웠다. 남미원뿔지대 국가들과 달리 콜롬비아는 '관료적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거나 국가전복 세력에 대해 이른바 '더러운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콜롬비아 군부는 정치 절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기관으로 남았다. 또 다른 특징은 1950년대 후반 선거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 평온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로 돌아온 본질적 원인은 전통적 지배층 사이의 우호적인 협상의 결과였다. 

 

출처: 현대 라틴아메리카 그린비 p350-367

1. 콜롬비아 경제: 커피에서 코카인까지

콜롬비아는 19세기 내내 경제가 별로 안 좋았어요. 이유는 정치도 너무 불안정했고, 나라 지형이 산이 많아서 지역 간 교류도 어렵고 돈이 안 돌았어요. 그나마 수출로 먹고살 수 있었던 건 금, 담배, 바나나, 커피였어요.

특히 커피가 완전 효자였어요. 1880년대 후반부터는 커피가 콜롬비아에서 제일 중요한 수출품이 됐고, 한때 수출의 80%까지 차지했어요. 미국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사 줘서 덕분에 돈도 잘 벌고 교통망도 좀 나아졌어요. 그리고 대형 농장이 아니라 소규모 농가들이 커피를 키워서, 중산층이 생기고 민주주의 기반도 생겼다고 해요.

그런데 1980년대부터 커피보다 더 큰돈이 되는 게 있었죠. 바로 마약, 특히 코카인이에요. 이게 경제에는 돈이 들어오니까 한편으론 도움이 됐지만, 환율도 흔들리고, 제조업은 죽고, 사회도 엉망이 됐어요. 이걸 **'네덜란드 병'**이라고 해요. 즉, 자원이 많아서 오히려 다른 산업이 망하는 현상이죠.


🏙️ 2. 사회 변화: 도시화, 노동운동, 불평등

콜롬비아는 한 군데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 중소도시에 흩어져 살았어요. 그러다 도시화가 조금씩 진행됐는데, 한 지역에 집중되지는 않았어요.

경제가 바뀌면서 노동자 계급도 생겼고, 특히 외국 회사가 운영하던 바나나 농장이나 철도 같은 데서 많이 일했어요. 이 사람들이 주로 급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갖게 됐고, 나중에 노동조합도 만들고 싸우게 돼요.

그런데 문제는 콜롬비아는 여전히 빈부 격차가 너무 심했어요. 땅도 몇몇 부자들이 다 갖고 있었고, 1970~80년대에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빈곤층이었어요. 이런 불평등은 결국 정치 불안정으로 이어졌고요.


🗳️ 3. 정치: 쿠데타, 개혁, 그리고 폭력

1900년대 초반, 보수당이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 대통령이 된 레예스는 독재에 가까운 통치를 했어요. 그래도 경제나 교통 정비에는 기여했어요. 하지만 미국과 파나마 관련 조약을 맺으려다 욕먹고 하야했죠.

1920~30년대에는 노동운동도 활발해졌고, 미국 회사가 운영하는 바나나 농장에서 파업을 벌이다가 군대가 진압하면서 '바나나 학살' 사건도 있었어요.

1930년대에 자유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개혁이 시작됐어요. 선거권 확대, 토지 개혁 시도, 산업 개발 등등. 하지만 기존 지배층과의 타협 속에 진짜 개혁은 많이 못 했어요.

그러다 1948년, 가이탄이라는 인기 정치인이 암살당하면서 나라가 폭발해요. 수도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폭력의 시대가 시작돼요. 정당 간 대립이 심했고, 민간 무장조직도 생겼어요. 콜롬비아는 남미 다른 나라들처럼 군부독재가 오래 가진 않았지만, 정치 폭력은 오히려 더 심했다고 볼 수 있어요.


✍️ 결론: 커피 향기 속 마약의 그림자

콜롬비아는 커피 덕분에 세계시장에 진출했고, 중산층과 민주주의도 생겼어요. 하지만 불평등과 정치 폭력, 마약 자금의 유입 같은 문제들이 발목을 잡았죠. 겉으론 민주주의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여러 문제가 쌓여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