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지역대학원(중남미학과)/라틴아메리카 역사

colonial latin america ch.7~8(식민지라틴아메리카 가족과 사회, 제국의 확장) 번역

jihyunprincess 2025. 5. 8. 07:38

가족: 식민지 사회의 기초

가족은 식민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기본적인 사회 단위였다. 인종, 재산, 직업, 성별 등은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구분하는 데 중요했지만, 이러한 특성은 대부분 보다 포괄적으로 정의된 가족의 틀 안에서 평가되었다. 이때의 '가족'은 생물학적 가족뿐만 아니라 **혼인과 대부모 선택을 통한 가족 네트워크(스페인어: compadrazgo, 포르투갈어: compadrio)**를 포함했다. 한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를 열거하는 것보다, 가족 전체의 경제적·정치적 활동을 이해하는 것이 식민지 세계를 장기적으로 이해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가족의 공동 목표는 구성원 개개인의 기회와 목표에 영향을 미쳤고, 때로는 이를 제한했다. 가족은 신용, 토지, 정치적 영향력과 같은 희소 자원을 제공하거나 차단함으로써 개인의 선택을 통제했다. 교육, 혼인, 직업, 심지어 여행조차도 가족의 관심사로 여겨졌으며, 이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가족의 지원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다.

가족 간 연계는 세대에 걸쳐 누적된 형태로 작동했으며, 가문은 그 혈통, 왕실에 대한 봉사, 특권 등을 통해 구성원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 따라서 야망 있는 남녀는 자신과 후손의 사회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가문의 명성을 제고하려 애썼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엘리트층에서 두드러졌지만, 관료나 도시의 자산가 계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인구조사에 따르면 핵가족과 한부모 가정이 일반적인 거주 형태였지만, 실제로 이베리아인과 원주민 모두에게 확대 가족이 실질적 사회·경제 단위였다. 원주민 귀족 역시 정복민 엘리트처럼 자신의 혈통을 자랑했으며, 가족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정복 이후에도 카시케, 쿠라카, 바탑 등의 세습 원주민 엘리트는 같은 계층과 혼인하며 평민과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일반 원주민들도 가족을 기본 단위로 인식했고, 혼인 결정에 있어 토지권 유지나 기근 시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페루와 멕시코 중부의 원주민 친족 네트워크의 지속성은 가족 유대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식민지 유카탄의 농촌에서는 부계 친족 5명과 그들의 아내, 미혼 딸로 구성된 확대 가족이 경제 단위를 형성했다. 이는 특별한 예가 아니라, 거의 모든 식민지 지역에서 이러한 가족 네트워크가 식민지의 노동과 조공 요구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공동체가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혼혈 계층(castas)의 가족

혼혈 계층, 즉 카스타 계층의 경험은 일반화하기 어렵다. 정복 직후 수십 년간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착민 일부는 원주민 여성과 혼인했고, 더 많은 경우는 비공식 동거 형태였다. 예컨대 **페루와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에서 초기 엔코멘데로 가정 거의 대부분은 원주민 귀족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의 자녀 중 일부는 유럽인 아버지의 가정에서 자라며 가문 명성 제고에 기여하려 했다. 이 원주민 여성과 자녀들은 양 문화를 매개하는 중요한 문화 중개자였으며, 언어·풍습·기술을 상호 전달했다.

그러나 유럽 여성의 수가 늘고, 엘리트 남성들이 **혈통의 순수성(pureza de sangre)**을 중시하게 되면서, 혼혈 자녀를 유럽인 가정에서 양육하는 경향은 약화되었다. 부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모계 공동체와도 단절된 이 아이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점차 혼혈 문화(casta culture)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문화는 원주민, 유럽인, 아프리카 전통이 뒤섞인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했다.

17세기까지 교회와 식민 당국은 대부분의 혼혈인을 **사생아(illegitimate)**로 간주했다. 실제로 다수는 유럽·원주민 친족과 연결되지 못한 채 도시와 농촌에서 일용직, 장인, 소상인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엘리트처럼 가문의 명성 제고를 체계적으로 추구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적 명성(근면, 정직, 용기 등)**은 지역사회나 마을에서 어느 정도 사회적 자산이 될 수 있었다.


혼인

스페인·포르투갈 왕실과 가톨릭 교회는 혼인 성사만이 정당한 가족 형성의 기초라고 보았다. 이베리아계 남성들은 다양한 여성과 관계를 맺었지만, 혼인은 거의 인종 내에서 이뤄졌으며, 초기 여성 부족 시기에도 예외는 드물었다. 엘리트 남성은 당연히 자신과 동일한 문화·계층의 여성과 혼인을 선호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으로 가장 큰 혜택을 누렸다.

혼인은 평생의 결속이었으며, 사랑이 아닌 책임의 결속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함께, 확대 가족 구조도 발전했다. 하지만 남성들이 인디언·흑인·카스타 여성과 비공식 관계를 맺는 일은 흔했고, 동거하거나 자녀를 낳기도 했으며, 여성은 사실상 가정 운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에서 자녀가 태어났을 경우, 일부는 스페인/포르투갈 아버지에게 법적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계층 및 지역에 따른 혼인 양상

엘리트층의 혼인은 경제적·정치적 동맹이었으며, 가문 전체의 명성 제고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계산은 엘리트뿐 아니라 도시의 중간계층, 원주민 사회에서도 있었다. 원주민은 일반적으로 동족과 혼인했지만, 일부는 흑인이나 혼혈인과도 결혼했다. 광산촌이나 도시처럼 인종이 뒤섞인 공간에서는 이웃이나 직업 기반의 결혼이 더 흔했다(예: 구두장이 딸과 구두장이 결혼).

혼혈인(castas)의 결혼율은 스페인인과 원주민보다 낮았다. 이는 그들이 원주민의 전통적 토지권이나 스페인 경제에 완전히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가족의 요구보다는 개인의 필요와 자원에 따라 혼인을 결정했다. 흑인 노예는 자유인보다 혼인율이 낮았다. 성비 불균형, 법적 제약, 주인의 반대 등 여러 요인이 혼인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시장여성이나 장인 노예 여성들이 결혼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 결혼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한 예로, 1731년 브라질 일류스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 엔젠호 산타나에서는 노예 성인의 60% 이상이 결혼하거나 사실혼 상태였다.


연령과 계층

계층과 인종에 상관없이 남성은 일반적으로 여성보다 연상이었다. 그러나 결혼 연령은 계층에 따라 다양했다. 스페인/브라질의 엘리트 가정은 성공한 고령 이민자 남성을 혼인으로 포섭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30대 중반 이후였고, 많은 경우 40세 이상이었다. 이민자 상인·관료는 보통 지위와 기반을 다진 후, 지참금을 지닌 여성과 혼인했다. 반면 식민지 출신의 부유한 남성가문 배경에 의존해 더 일찍 결혼했다.

 

이처럼, 결혼은 단순한 개인 간 결합이 아니라 가족, 가문, 그리고 사회 구조 전반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였다. 상류층과 중간계층 모두에게 있어 결혼은 개인적 욕망보다 가족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재산, 혈통, 명성의 유지와 확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기능했다.

식민지 사회에서 **가족의 명성(reputación)**과 네트워크는 단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아니라, 경제적 자산·정치적 영향력·법적 보호를 획득하는 데 핵심적인 기반이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가, 나아가 인디언, 유럽인, 흑인, 혼혈인 각 집단이 처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족 내 위치와 역할을 설정하게 되었다.

여성, 특히 과부나 여성 가장은 때때로 남성과 동등하거나 더 큰 경제적 결정을 내리며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이끌었고, 노예 여성자유 여성 모두 도시 경제와 상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혼혈 사회의 확장은 유럽-원주민 간 통혼, 비공식적 동거, 노예 여성과 정복자 간 관계 등을 통해 이뤄졌으며, 이는 **새로운 문화적·사회적 정체성(casta culture)**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 혼혈인의 가족 구조와 사회 내 입지는 상대적으로 취약했고, 노동 계층으로서 일상 속에서 가족을 유지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식민지 후기에는 가족 내에서 여성의 자율성과 재산권이 부분적으로 확대되었고, 과부 여성의 재산 관리 능력은 상속, 교육, 자녀의 진로 선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일부 여성은 법적 상속자나 후견인으로서 남성과 유사한 권한을 행사했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 이상과 실제 가족 구조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결국, 식민지 라틴아메리카 사회에서 가족은 단순한 친족 단위가 아닌,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축이었으며, 각 시대와 지역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고 적응하면서 식민지 질서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했다.

 

식민지 사회와 경제 속 여성

인종과 사회적 지위라는 틀 안에서, 성별은 식민지 라틴아메리카에서 개인의 위치를 결정짓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민지 사회는 가부장제였으며, 남성과 여성의 활동, 즉 부부의 역할 구분은 지역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이베리아 전통과 원주민 전통 모두에서 유래한 바 있는 성 역할 구분을 반영했다.

통상적으로 남성은 모든 시민 관직을 맡았고, 정치적 결정을 내렸으며, 가장 이윤이 큰 경제 활동을 지배했다. 남성은 들판과 광산에서의 중노동, 건물과 선박 건설, 도로 작업, 짐꾼·노새몰이꾼·선원 등 운송 노동을 담당했다. 또한 군 복무와 성직 대부분을 독점했으며(수녀원을 제외한), 고등 교육, 상인 조합(consulado), 대다수의 수공업 조합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남성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남성 중심적 묘사는 식민지 현실의 복잡성을 충분히 담지 못한다. 실제 여성의 기여는 매우 광범위했다. 특히 상류층 과부 여성은 광산, 농장, 부동산 등 거대한 자산을 관리했다. 남편이 부재 중이거나 여성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경우, 여성은 종종 수공업자, 지주, 농부, 목장 운영자  전통적으로 남성의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은 공공 시장에서 매매 활동을 주도했고, 일부는 의료와 종교 영역에서 위험하거나 주변적인 역할(치료사, 약초사, 점술사, 영매 등)을 수행했다.

노동계급 여성의 경우, 가정 유지에 있어 여성의 자본 투자, 노동, 기업가적 기술은 필수적이었다. 농촌과 도시의 대부분 가족은 남성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거의 항상 생필품 가격은 남성 노동자의 임금보다 높았다. 예: 소작농, 목동, 직조공,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목수 등.

많은 여성은 가정 외에서 일했다. 브라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과 소규모 농장은 노예든 자유민이든 여성 노동자에 의존했고, 특히 수확기에는 필수였다. 소농과 목장주들도 임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었기에, 아내와 딸의 노동에 의존했다. 우루과이 농촌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여성과 자녀가 소유·운영한 농장이 상당수였다. 소매 시장 역시 여성 판매인들이 실, 빗자루, 수공예품, 과자, 빵, 케이크 등을 판매하며 유지되었다.

식민지 제조업에서도 여성의 존재는 중요했다. 일부 직물 제조는 전적으로 여성의 손에 있었고, 16세기 멕시코시티에는 여성 조합(guild)이 존재하며 여성 임원도 있었다. 여성은 **직물·도자기 공장과 오브라헤(obrajes)**에서도 일했으며, 1769년 과달라하라에서는 전체 제빵소의 1/3이 여성 소유였다. 여성 참여가 공식적으로 금지된 수공업 분야에서도, 여성은 도구 정비, 원자재 준비 등에서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예: 구두장이가 신발을 꿰매면, 아내는 가죽을 손질하고 재단.

조합 규정상,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조합원과 재혼해야 가게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과부들이 이를 무시하고 사실상 독립 수공업자로 활동했다. 또한 많은 중하층 여성은 세탁, 방 임대, 가정부 등의 일을 통해 가계 수입을 보조했다.


하녀와 노예 여성

모든 상류층 가정은 요리, 청소, 유모 역할을 위한 여성 하인을 필요로 했다. 이들 중 거의 모두는 자유인이 아니었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거의 모든 여성 하인은 스페인 가정에 강제로 봉사하도록 된 인디언이었다. 이런 강제성은 일부 지역에서 식민지 말기까지도 지속되었고, 변방 지역의 원주민 전쟁 포로 여성도 가정부로 동원되었다.

아프리카계 노예 여성도 식민지 사회에서 핵심적인 가사노동력이었다. 거의 모든 엘리트 가정은 흑인 노예를 보유했고, 그 다수는 여성으로 청소, 요리, 의복 제작 등 거의 모든 가사 업무를 담당했다. 여성 노예는 종종 **혼수품(dowry)**의 일부로 제공되었으며, 이는 그녀들이 “품위 있는 가정”의 필수 요소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빈곤한 자유 여성 중 일부도 하녀로 일했지만, 생활 수준은 노예나 인디언 하인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 여성은 직업 선택, 배우자 결정, 신체 처벌 면제 등의 측면에서 더 많은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여성 노예는 남성보다 **해방(manumission)**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가장 많은 경우는 노예 여성들이 자력으로 주인에게 자신의 시장 가치를 지불하고 자유를 획득한 사례였다. 이는 노예 여성조차도 상품을 생산하거나 노동을 제공하여 소득을 창출했음을 보여준다. 도시에서의 활발한 경제 활동 덕분에, 여성 노예는 노예 공동체 내에서 문화 변화를 이끄는 핵심 주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성적 착취에 가장 취약했으며, 이들은 혼혈 인구 형성 및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전통의 융합에 있어 강제로 참여한 존재이기도 했다.


상류·중산층 여성과 과부

상류층 및 중간 계층 여성의 주요 책임은 출산과 육아, 가사 관리, 문화 가치 전수였다. 이베리아 이상적인 여성상은 ‘모성과 아내 역할에 충실’해야 했지만, 심지어 엘리트 여성도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특히 남편이 농업, 광업, 상업을 위해 출타 중일 경우, 아내는 상가나 임대 부동산 관리를 맡았다.

**여성 가장(female-headed household)**의 수는 매우 많았다. **후기 식민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구 중 38%, 브라질의 오우로프레투에서는 45%**가 여성 가장이었다. 많은 식민지 가정은 유동적인 구조와 기능을 가졌고, 가부장적 이념은 현실의 필요나 선택에 의해 흔히 무너졌다.

상류층 과부는 식민지 경제에서 가장 큰 자유와 활동 범위를 누렸다. 스페인 아메리카에서는 과부가 혼수(dowry), 남편이 제공한 결혼 자산(arras), 혼인 기간 중 형성된 재산의 절반을 보유했다. 과부는 또한 미성년 자녀의 상속 재산 관리도 맡았다.

예: 도냐 헤로니마 데 페날로사는 페루 총독의 법률 고문이자 판사였던 남편 사후, 부동산·농장·광산·제당소·스페인 자산 등 막대한 가산을 독립적으로 관리하고, 확장했으며, 아들 셋은 스페인 유학, 딸은 35,000페소 혼수로 시집보냈다.

18세기까지는 여성이 남편의 유언집행자(executor)가 되는 일이 일반화되었으며, 예를 들어 칠레의 마리아 호세파 살라스는 남편 유산을 관리하며 딸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브라질의 이자벨 마리아 게데스 드 브리투는 17세기 후반 남편 사망 후, 가문 사업을 인수하고 유지했다. 과부들은 자산을 딸에게 상속하기도 했고, 일부는 신용과 대출을 통해 경제력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혼인과 가문 전략

바키하노 이 카리요 데 코르도바 가문 사례는 혼인, 친족 연결망, 자산 다각화, 과부의 사업 지속성 등 엘리트 전략을 잘 보여준다.

후안 바우티스타 바키하노는 비스카야 출신으로 18세기 초 리마에 이주해 상인으로 성공했고, 44세에 20세의 크리올 출신 상류층 여성 마리아 이그나시아 카리요와 혼인했다. 그는 선박, 상업, 농업에 투자했고, 1755년 비스타플로리다 백작 작위를 샀다. 1759년 사망 후, 아내 마리아는 형제 루이스(궁정 성직자)의 도움으로 남편 사업을 이어가고 더 크게 성공, 상속 자산은 남편 때보다 많았다.

장남은 마드리드에 정착해 국채와 상업에 투자, 차남은 리마 법원에서 관직을 맡았다. 딸 5명은 시의회, 상인조합, 민병대, 부왕청 등과 연결된 유력자와 혼인해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처럼 엘리트 가문은 혼인·정계 연계·사업 다각화를 통해 지위를 유지·확장했다.

 

명예의 문화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민자들은 이베리아 문화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명예(honor)’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을 아메리카로 가져왔다. 명예란 개인과 가족이 사회적 위계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대한 인식과 이를 방어하려는 태도를 의미했다. 그것은 식민지 사회의 놀랍도록 복잡한 계급, 성별, 인종, 부, 문화 간 관계를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한 현대 학자의 말에 따르면, “명예란 무엇보다도 굴욕과 수치심의 경험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으로, 타인의 성공을 시기하고 자신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성향을 드러낸다.”

엘리트 가문들은 명예에 깊이 몰두했다. 그들은 관직과 보상의 경쟁, 상거래, 자녀의 혼인, 대부모 선택, 공식 만찬의 좌석 배치 등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명예는 누가 동등하고, 누가 열등한지를 정의했다. 예컨대 누가 초대를 받는가, 누가 서 있고 앉는가, 누가 모자를 쓰고 있는가 또는 벗는가와 같은 사소한 예절조차 명예와 관련 있었다.

성인식, 군주 대관식, 축일 행렬 등에서의 서열 다툼은 수년에 걸친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도전을 받고도 이에 항의하거나 복수하지 않으면 명예를 잃었다. 명예와 서열을 둘러싼 경쟁은 사회 구조를 위계적으로 정리하는 동시에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가문과 명예의 관리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은 명예 주장의 물질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협력했다. 그들은 혼인 동맹, 상속, 유력 가문과의 관계 구축을 세심히 관리했다. 특히 **지참금(dowry)**은 고귀한 혈통의 남성이나 출신이 확실한 이베리아 이민자와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는 수단이었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혼인 관행을 관찰한 이는 이렇게 말했다.

“상파울루 사람들은 딸에게 광대한 토지, 인디언, 노예를 지참금으로 줄 수 있었으며, 신랑을 고를 때는 재산보다 혈통(민족성과 귀족 출신)을 더 중시했다.”

또한 가문은 관료직, 민병대 지휘관직, 종교형제회 직책 확보에 힘썼다. 이 명예 추구는 때로 매우 비용이 많이 들고 낭비적이었다. 예: 교회·수도원 기부, 공공사업 후원, 축제 비용 부담, 하인들과의 화려한 외출 등. 심지어 상업으로 재산을 축적한 이들도 토지를 매입하여 사회적 체면을 맞추기 위해 지주로 변신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행은 유럽 출신 이민자와의 혼인을 위한 크리올 지참금 경쟁, 혼혈인과 빈민에 대한 멸시로도 이어졌다. 이처럼 엘리트 남성은 아내와 딸의 성적 명성이 자신의 명예와 직결된다고 보았기에, 여성은 교회나 집 밖으로 나갈 때 반드시 남성 보호자의 감독을 받았다. 반면 빈민 여성은 이러한 보호를 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남성에 대한 의존도는 더 낮았다.


명예의 유연성과 제도화

하지만 명예는 모든 사회 관계를 고정된 틀로 결정하는 경직된 규범은 아니었다. 엘리트 남녀는 종종 이를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 예: 사제들이 임신한 엘리트 여성과 공모하여 혼외 자녀를 고아로 등록하거나 입양하거나, 충분한 지참금을 지급하면 결혼 가능한 사례도 있었다.

남성 혹은 그 조상이 혼외 출생, 유대인·무슬림·흑인 혈통을 가졌을 경우 고위직 진출이 금지되었지만, 왕에게 명예 회복을 청원하고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극복되었다. 이는 **18세기에 '그라시아 면허 증서(cédulas de gracias al sacar)'**라는 형식으로 제도화되었다.


중간계층과 노예층의 명예

엘리트들은 명예를 자신들만의 특권으로 여겼지만, 중간계층 역시 명예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의사, 변호사, 숙련 장인도 법정 다툼이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욕에 대응했다. 심지어 하급 노동자나 노예들조차 명예와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며, 모욕에 법적 또는 물리적으로 맞섰다.


가족과 명예의 확산

식민지 사회의 기본 단위였던 확대 가족은 상류층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경제·사회적 성숙을 이룬 지역들(헤시피, 살바도르, 산티아고, 리마, 과테말라, 푸에블라 등)에서는 유력 가문들 간의 혼인 연합과 이베리아 출신 남성의 통합이 이뤄졌다.

원주민 사회도 가족 구조를 유지했지만, 역병, 강제이주, 자발적 이주 등으로 위협받았다. 가장 심한 영향을 받은 집단은 자유 혼혈층이었다. 초기 세대의 높은 사생아율정상적인 가족 네트워크 형성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혼혈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들 또한 점차 확대 가족이라는 식민지적 이상에 부합하는 가족 구조를 형성했다.

 

 

식민지의 공간

유럽인의 정복과 정착은 신세계의 건축 환경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구조 전반을 변화시켰다. 짧은 시간 안에 정복자들은 원주민 엘리트들의 피라미드, 고상한 광장, 공놀이 경기장, 궁전을 허물고, 성당, 수도원, 행정 건물, 개인 저택 등 자신들의 건축물을 세웠다. 생존한 원주민 전통과 유럽에서 이식된 양식 모두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사회 발전의 배경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건축의 진화, 즉 원주민 양식에서 성숙한 식민지 양식으로의 변화는 중앙 멕시코와 페루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지역은 정복 이전부터 대규모 도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시티와 리마는 부총독의 수도로서 빠르게 중심지가 되었다. 1630년까지 멕시코 관할 지역 인구의 58%, 리마 관할 지역의 55%가 두 수도에 거주했다. 그 다음 중요한 도시는 푸에블라, 보고타, 과테말라, 산토도밍고였고, 그 다음으로 파나마, 키토, 쿠스코, 과달라하라, 라플라타(현 수크레), 산티아고가 위치했다.

스페인 이민자들은 초기에는 인디언 거주지 근처에 정착했으며, 엔코미엔다 제도는 이러한 추세를 강화했다. 이후 풍부한 광물 자원의 발견은 포토시, 사카테카스 등 광산 도시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카르타헤나, 아바나, 포르토벨로, 베라크루스와 같은 항구도시의 상업 번영은 민간 이주와 군사 주둔을 불러왔다. 이처럼 스페인 인구의 증가와 시장경제의 발전은 결국 세금 및 행정 제도의 구축으로 이어졌고, 공공 재정과 행정 시스템은 도시의 위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의 급증은 스페인 아메리카 내 주요 도시들 간 강한 경제적 연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북미의 영국 식민지 도시들이 훨씬 더 상호 연결되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리적 장애물, 복잡한 규제, 법적 금지조항 등이 스페인 식민지 내 지역 간 무역을 방해했다. 대부분의 식민지 도시는 서로보다 세비야나 카디스와의 연결이 더 강했다. 브라질은 사탕수수 수출 중심의 단일경제 구조로 인해 이 경향이 더욱 뚜렷했다.


식민지 도시

**식민지 도시의 중심부(traza)**는 건축과 문화 면에서 철저히 유럽적이었다.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가장 웅장한 종교 및 세속 건물들이 배치되었으며, 인근에는 엘리트 가문의 저택이 들어섰다. 대부분의 스페인 이민자와 그 자손들은 하인과 노예를 거느린 채 중앙 구역의 대형 저택에서 살았다. 부유한 혼혈인(casta)들도 광장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 살기를 원했다.

도시의 교회와 수도원은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멕시코시티의 대성당은 미대륙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웠다. 리마의 대성당과 수도회 교회들도 은과 벨벳,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엄청난 부와 권위를 자랑했다. 이에 비해 세속 건물들은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유럽의 궁전들에 비하면 건축적으로 평범했다. 리마와 멕시코시티의 부총독 궁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 광장은 시장의 중심지이자, 공개행사의 공간이었다. 축제, 성직자 행렬, 황제 대관 축하행사, 종교재판, 투우, 공개처형 등이 여기서 벌어졌으며, 행렬 순서조차 사회 서열을 반영했고, 서열을 어기면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식민지 엘리트는 외양과 과시를 중요시했다. 멕시코시티에는 장식된 마차, 흑인 하인이 운전하는 마차, 칼 싸움, 연애 행위, 그리고 궁정 스타일의 퍼레이드가 벌어졌으며, 리마,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다른 도시들도 공원이나 산책로를 갖춰 엘리트의 오락 공간으로 기능했다.


주거지의 위계와 일상

엘리트의 주택은 2층 석조 건물에 안뜰과 마굿간을 갖춘 대저택이었고, 상점·주택·작업장이 혼재해 있었다. 장인, 상인, 부유한 이들도 주택 일부를 상점이나 임대 공간으로 활용했다. 집기류, 도자기, 비단 커튼, 은식기, 종교 화상과 악기, 서재 등은 유럽 문화의 수입품과 식민지 생산물이 결합된 생활양식을 보여주었다.

반면, **가난한 인디언, 혼혈인, 흑인, 노동자층은 도시 외곽의 빈민가(barrios)**에 거주했으며, 비포장 도로, 진흙탕, 먼지, 하수, 좁고 열악한 주택이 특징이었다. 일부는 건물 뒷방, 창고, 마당, 심지어 거리에서 생활했으며, 높은 임대료결혼과 출산을 늦추는 원인이 되었다. 빈민가의 생활은 혼잡, 취약한 여성 보호, 주정, 폭력, 빈곤으로 점철되었고, 상점과 공방도 여기 위치해 있었다.


식민지의 일상생활

식민지 사회의 일상은 계급 간 격차와 도시-농촌의 불균형을 반영했다. 농촌 대다수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종교 행사나 세속 축제가 유일한 탈출구였고, 전염병, 혼혈, 시장경제의 침투로 전통 원주민 문화는 약화되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다양한 오락을 즐겼지만, 장시간 노동, 부족한 식량, 건강 문제, 폭력과 범죄에 시달렸다. 엘리트만이 고급 문화를 온전히 향유했지만, 하층민도 종교 축제, 술, 음악, 게임 등에서 일시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문화 환경

식민지 체제는 원주민과 크리올 문화유럽의 문화 지배에 종속시켰다. 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문화 식민주의는 정치·경제 제도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고, 독립 이후에도 뿌리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식민지의 문화 환경은 유럽과의 접촉 강도, 지역의 부, 사회 구성에 따라 달랐다. 주요 도시의 엘리트는 이베리아 문화를 모방했고, 서적, 음악, 예술의 지속적 유입이 있었다. 반면 외딴 지역에서는 종교 교육과 축제가 중심이었다. 원주민 인구와 아프리카 노예가 많은 지역에서는 비유럽적 전통이 살아남아, 이베리아 문화와 섞인 독특한 민중문화를 창조했다.